‘타이거 박’은 사라지고 ‘봉’이 된 백발노인만 남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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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 박’은 사라지고 ‘봉’이 된 백발노인만 남았네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4.05.2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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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원주민 섬기는 모리아선교재단 박운서 장로
▲ 액자 속에서 고위 공직자, 큰 기업의 사장으로서 내뿜는 강한 인상을 오늘 박 장로에게선 찾을 수 없다. 편안히 보장된 노후를 내려놓고 필리핀 오지에서 사서 고생을 하는 가운데 여러 차례 깨지고 부서졌지만 하나님은 그때마다 넘치는 은혜로 그를 더 아름답게 빚어주셨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 장로는 기자 앞에서 여러 차례 흐느꼈다. 부끄러운 옛일을 꺼낼 때면 어김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후렴구처럼 뒤따랐다. 행정고시 출신으로 뉴욕 총영사관 경제협력국 영사, 대통령 경제비서관, 공업진흥청 청장을 역임했으며 초대 통상산업부 차관 때 화끈한 대외 협상을 보여줘 ‘타이거 박’이란 별명까지 얻었던 박운서 장로(75).

퇴직 후 필리핀 밀림 속에 교회를 14개나 짓고 쌀농사를 지어 굶주린 원주민들을 먹이며 새마을운동을 펼치는 동안 그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다. 그의 얼굴에선 더 이상 과거 고위 관료 시절의 위엄이나, 그후 한국중공업 사장과 LG상사 부회장을 역임했을 때의 당당함은 흔적도 없다. 속고 또 속고, 참고 또 참아온 세월의 흔적만이 깊이 패인 주름 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1년 만에 교회 나가 종일 울었다
2005년 3월 31일, 박운서 장로는 은퇴를 앞두고 삼일절에 양평기도원을 찾았다. 허전했다. 숨 가쁘게 일해 온 40년은 너무 빨랐다. 장관 한 번 못하고 물러나다니, 아쉽기도 했다. 마지막 날이었다. 비몽사몽간에 필리핀 지역이 보였다. 선교 후원 차 가본 적은 있지만 잊고 있었는데, 웬일일까.

“갑자기 ‘네가 거기 가거라’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거예요. 청천벽력같은 소리죠. 하나님, 제가 나이 65세에, 선교사 훈련도 안받았고, 암 것도 못하는데, 우째 갑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선교는 내가 하는 거지 네가 하는 거냐 이러시는 거예요. 그래도 전 못갑니다, 하고 내려왔지요. 그런데 그 명령이 잊혀지지 않는 거예요.”

박 장로는 이미 하나님께 크게 빚진 사연이 있었다. 어린 시절, 목회자의 딸이었던 어머니 슬하에선 교회를 잘나갔다. 서울대학교를 들어가면서, 그는 ‘내 인생 내 맘대로 산다’고 작정했다. 교회 가는 발걸음을 끊었다. 목사, 장로, 권사가 숱한 집안에서, 그는 걱정거리였다.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시작으로 공직생활은 탄탄대로였다. 뉴욕 맨하탄의 한국총영사관에 경제협력국 영사로 갔을 때까지도 좋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친구 보증을 선 것이 잘못돼 돈 날리고, 아이들이 다치고, 자동차를 도둑맞는 일들이 잇달았다. 하나님은 그의 발걸음을 교회로 몰아가셨다.

“21년 만에 처음 교회를 나갔습니다. 퀸즈장로교회의 부흥회에서 임영재 목사님 설교를 듣는데 그렇게 말씀이 제 맘에 마구 들어오는 거예요. 마지막 날 철야기도를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을 꿨어요. 아버지가 제 손을 잡고 어린 시절 다녔던 교회 지하실로 데리고 가시는데, 거기 흰 천으로 덮인 관들이 보였어요.”

▲ 필리핀 망양족들과 기도하는 박운서 장로(맨 오른쪽).

싸다 풀고 또 싸다 푼 보따리
첫 번째 것을 들추니 교회를 잘 다니셨던 큰할아버지가 거기 계셨다. 천사같은 모습이었다. 두 번째 관을 여니 예수를 믿지 않았던 친할아버지였다. 얼마나 끔찍한 모습이었던지, 그는 깜짝 놀라서 깨어났다.

둑이 터지듯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한없이 엉엉, 울었다. 사람들이 부끄러워 그는 차를 타고 롱아일랜드공원으로 갔다. 그날 직장도 나가지 않고 하루 종일 거기서 통곡했다.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이여’, 이 찬송을 수십 번 불렀다. 잊을 수 없는 1979년 11월 23일이었다.

그날 이후 박 장로는 철저히 주일성수하고 시간을 쪼개 양로원과 고아원, 장애인 시설들을 찾아다니며 구제활동에 앞장섰다. 상공부에 가서는 정부부처 최초로 신우회도 만들었다. 그후로 각 부처에서 신우회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려온 직장생활, 이제 은퇴해서 여생을 편히 쉬려는데, 하나님께선 벽력같은 명령을 주신 것이다. 이제 퇴직했으니 본격적으로 내 일을 해라. ‘필리핀 오지로 가라, 내 양을 먹이라!’
하나님께 등 떠밀려 필리핀에 간 박 장로는 숱한 어려움에 부딪힌다. 65kg이었던 그가 45kg까지 체중이 빠질 정도로 열악했던 환경은 사실 둘째 문제다. 그가 도와주려던 사람들은 도리어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약속을 안 지키고, 억지를 부리며 물건까지 손대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의 ‘청지기 훈련’이었다. ‘내 것이 내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보따리를 세 번 쌌다가 풀었는데, 그 세 번째가 정말 힘들었죠. 어느 날 강도 세 명이 든 거예요. 저를 총으로 위협하고 때리고. 그때 정이 뚝 떨어졌죠. 자기들 도와주려는 날 이렇게 대하다니. 그래서 진짜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보따리를 쌌어요. 다 정리하고 이제 내일 비행기만 타면 됐거든요. 그런데 그날 밤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어요. 저는 하나님의 손만 봤어요. 붉대요. 벌겋게 불꽃이 이글거리는 손으로 금면류관을 주시면서 천년왕국 시민권을 제게 주신대요.”

그는 또 울었다. ‘퇴직하고 이제 용도폐기된 인간을 하나님 아부지께서 쓰신다고 불러주셨는데 내가 감사는커녕 이 지랄을 하고 있다’고 가슴을 쳤다. 다시 풀던 보따리 위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싸지 않았다. 다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 박 장로가 세운 교회의 교인들이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있다.
‘참.용.사.낮.바.봉’의 소원
“그전까지는 주일성수하고 봉사하면서 내가 주인이었고 하나님은 보조자였어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잘 보일까, 성과지향적으로 업적을 남기려고 했지요. 그런데 이제는 주님이 주인이시고 난 심부름꾼이다, 라고 깨달았죠. 머리의 믿음이 가슴으로 내려온 겁니다. 그 후로는 다시 보따리 안 쌌어요. 물론 험한 일을 계속 일어났지만요.”

그가 섬기는 민도르 섬의 망양족은 필리핀의 112개 종족 중에 가장 가난하고 오지에 사는 부족이다. 험한 지역에 교회를 세우려다 보니, 그는 참기름 바른 것 같은 비탈길을 기어오르다가 갈비뼈가 부러지고 발목이 부러지기도 했다. 그런 역경 속에서 14개의 교회를 세웠다.

쌀농사를 지어 일자리도 제공하고 3-4백 가마 분량으로 쌀밥도 먹인다. 하얀 쌀밥과 돼지고기 찌개를 먹는 망양족을 보면 기쁘기도 하고 염려도 된다. 저러다 배터지지 않을까. 힘든 사역인만큼, 안수한즉 병이 낫고, ‘다무옹’ 귀신에서 해방된 모습을 보는 희열도 주셨다.

“모리아선교재단을 세워 새마을운동도 벌이고 의료봉사 등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 14명에게 사례금도 주고 우리 기숙사에선 아이들 25명을 공부시켜주고 있습니다. 신학생도 4명 학교 보내고 있고요.”

차관으로 은퇴한 그에겐 매달 적지 않은 연금이 나온다. 그는 이것을 그 모든 사역에 쏟아 붓는다. 박 장로는 종종 엘리트들과 함께 일하며 수많은 부하직원들을 부리던 때가 그립지 않을까? 그는 “그때 함께 일하던 사람들, 감옥에 갔잖아요?”하면서 웃는다. 배가 두둑이 나온 풍채 좋던 그 시절의 모습, 사실 그 안에는 스트레스와 출세욕이 가득했었다. 뼈와 가죽만 남은 지금이 오히려 더 건강하단다.

그의 방 벽에는 알쏭달쏭한 말이 붙어있다. ‘참.용.사.낮.바.봉’ 그의 소원이다. ‘주여, 나를 만들어 주소서. 참고 견디며, 용서하고, 사랑하며, 낮아지고 겸손하며, 바보가 되고, 봉이 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소서!’ 소원은 이뤄져, 그는 즐겁게 봉이 되고 있다. ‘네가 가라, 내 양을 먹이라’(코리아닷컴)는 책에서 그 기쁨을 소개했다. 그리고 초청한다. “필리핀에서 그 즐거움 함께 나눌 동역자 어디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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