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운동은 오늘날 빠르게 성장한 신앙운동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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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운동은 오늘날 빠르게 성장한 신앙운동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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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5.1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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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운동과 상황신학
▲ 조병하 교수

그리스도교 역사상 매우 특징 있는 신앙운동들 중에 하나가 오순절운동이다. 1906년 로스앤젤레스 공단지대 아주사 312번가에 버려진 한 감리교회가 20세기 새로운 신앙운동으로 주목받게 되는 오순절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흑인 성결운동 설교가 윌리엄 제이 세이모어(1870-1922)가 이곳에 “사도신앙복음선교회”를 설립하여 커다란 반향을 얻었다. 주로 성결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세이모어는 찰스 폭스 파함(1873-1929) 목사에게 감리교적이고 성결주의의 양육을 받았었다. 파함은 텍사스와 캔자스주에 있는 학교들에서 모든 회심자들과 성결운동 옹호자들이 반드시 “성령과 불의 세례”를 기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와 함께 파함은 성령세례의 특별한 표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19세기 말의 감리교는 성결파의 많은 전통을 가르쳤으나 치유의 은사를 포함한 성령의 은사들을 더 강조하였었다.

1906년 아주사 거리에서 시작하였던 부흥운동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지와 여타 언론들의 주목을 받았다. 열정적인 기도, 방언, 간절한 찬송, 신유로 특징이 지어졌다. 무엇보다도 여성이 모든 공적활동에 완전히 참여하는 일이었다. 인종장벽을 당연시 하였던 시기에 흑인과 백인이 함께 집회에 참석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주사에서 있었던 예배에는 세계 곳곳으로부터 수많은 방문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회심 후의 특별한 성령세례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새로운 연합, 인쇄물들에 의한 연결망, 설교자들과 치유사역자들의 순회사역들로 1914년 가장 큰 오순절 교파가 되었던 하나님의 성회가 세워졌다. 오순절 운동 역시 처음에는 교파형성에 목표를 두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순절운동은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리고 성령의 직접체험에 대한 갈망은 오순절주의자들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당시의 역사를 관찰하던 사람들은 아주사 거리의 운동을 1904-1905년에 일어난 웨일즈 부흥운동과 미국 전역에 큰 영향을 끼쳤던 “늦은 비 운동”과 연결시켰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이러한 운동은 오늘날 매우 빠르게 성장한 신앙운동의 기원을 상징하고 있다.

오순절운동은 보편적으로 성결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웨슬리의 후계자로 알려져 있는 영국의 신학자 존 윌리엄 플레처(1729-1785)는 성결을 성령론적 범주 내에서 이해하였다.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은 미국이라는 종교, 문화배경에서 웨슬리안과 칼빈주의의 양진영에서 발전하였다. 성령의 급진적인 역사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즉, 인간의 죄성은 성령의 불세례로써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오순절운동은 주 관심이 성결보다 성령의 은사, 즉 방언에 강조된다는 면에서 성결운동과 구분할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1930년대까지 복음적인 근본주의자들이 합리주의적인 유니테이런 사상과 자유주의신학과의 싸움에서 변증의 일로 힘을 소진하고 있었고, 현대주의 사상들이 탈 그리스도교적인 종교다원주의로까지 극단적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오순절과 같은 성령의 가시적인 역사와 은사를 추구하는 신령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1940년경부터는 신유의 은사를 설교하던 부흥사들은 신유 대신 번영과 축복을 강조하여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이후에는 한국 교회에도 번영이라는 주제가 가난을 벗어나 잘살아보려는 바램에 교회로 나오게 하는 자극이 되기도 하였다. 이는 한국 교회에서 복음을 기복신앙으로 약화시키는 아쉬움을 낳게 하였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남미의 해방신학이라는 말과 함께 미국의 흑인신학, 여성신학이 제시되었고 한국 교회에서도 같은 범주의 민중신학이 일어났다. 이러한 정치신학들은 그 신학적인 차이가 있지만 로마 가톨릭 정치신학자 제이 비 메쯔와 희망의 신학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프로테스탄트교의 유르겐 몰트만의 신학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들의 신학은 제3세계로 알려진 남미지역 등에서 크게 위세를 떨쳤다. 이러한 종류의 신학이 텍스트인 성경에서 출발하지 않고 현실적인 사회적 상황에서 출발하여 문제를 살피고 그 해법을 찾으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상황신학이라고도 한다. 신학의 세속화는 디트리히 본훼퍼 이후 성공회의 존 로빈슨의 ‘하나님은 저 위에 계시지 않는다’와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를 통해 알려졌고, 남미의 대표적인 해방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쯔가 앞서 있다. 한국에서의 상황신학의 하나인 민중신학은 1970-1980년대 군사 독재 정부에 항거한 신학운동이었음으로 군사정권의 종식과 더불어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어 전 세계로 확산되었던 여권신장운동은 교회에도 영향을 끼쳤다. 1853년 뉴욕회중교회가 처음으로 여성목사를 안수한 이후 여성목사를 세우는 교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큰 교파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일부 소수의 여성신학자들은 여성들이 목사가 되어 교회의 책임을 맡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 불만을 갖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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