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당신처럼 살았다면 이 세상은 천국이 됐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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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당신처럼 살았다면 이 세상은 천국이 됐을 거예요”
  • 김목화 기자
  • 승인 2013.09.24 22:5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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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17일, 하늘에 새로운 별이 떴다. 작아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따금 외롭거나 삶이 고되 울음 짓고 있으면 내 머리 위에 살며시 나타나 위로해주는 별, 바로 권정생의 별. ‘강아지똥별’이다.

책 ‘강아지똥별’을 따라 故 권정생의 삶을 엿보다

어린 시절 권정생의 동화세상에서 뛰놀았던 기억이 아련히 생각난다면 아마 지금 당신은 훌쩍 커버린 어른이겠다. 맑고 순수했던 그 어린 시절의 ‘나’를 잃어버렸다면 이번엔 ‘강아지똥별’이 된 권정생 선생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는 건 어떨까?

200만의 부모와 아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 한국 아동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히는 권정생. 그는 이제 이 땅에 없지만 남겨진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 속을 울리고 있다. 단순히 베스트셀러 동화 작가에 그치지 않는 그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평생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소외되고 고통받는 존재들을 감싸 안고 모든 생명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삶은 그의 작품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정생은 1937년 일본, 헌 옷 장수 집 뒷방에서 태어났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있던 시기 그의 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무척이나 가난했던 그의 가정은 모진 고생 끝에 해방이 되어서야 조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하지만 지독한 가난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 권정생 선생의 삶을 그의 수기와 작품들, 그 밖의 자료들을 토대로 해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재구성한 책. 1990년 겨울, 생전에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던 권정생을 인터뷰한 뒤로 그 인연을 깊이 새기고 있다가 마침내 그의 일대기를 이야기로 엮었다. ⓒ'강아지똥별', 김택근 지음, 추수밭 출판, 가격 13000원.
어린 시절부터 그는 똑똑하고 매사에 생각이 깊었다. 공부를 무척 잘했던 그는 월반과 동시에 중학교에 들어갈 것을 권유받기도 했다. 하지만 정생에게는 항상 가난의 그림자가 붙어다녔다.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었던 정생은 학비를 벌기 위해 열여섯 살 부산의 재봉기 상회 점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3년 되던 해 그의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병은 깊어졌고 결국 몸져누웠다. 뒤늦게 찾아간 병원에서는 늑막염과 폐결핵이 겹쳐 심각한 상태라고 나무랐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날이 걱정됐다. 1957년의 2월, 정생은 그렇게 누워서 스무살이 되었다. 그리고 정생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4년만의 귀향이었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둘러 앉아 함께 밥을 먹다가 정생은 가족들의 수척한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목이 메어왔다. 다 큰 아들이 객지에서 돌아왔지만 당장 내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의 앞에는 잔인한 세월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생의 병세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폐뿐만 아니라 신장, 방광결핵으로 온몸이 아팠다. 10분마다, 심하면 5분마다 소변을 봐야했다. 게다가 소변볼 때 고통은 참기 힘들었다.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었다. 하지만 정생이 아픈 것은 몸만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가족들을 보면 마음이 저미듯 아팠다. 정생은 날마다 죄책감에 시달렸다. 가족들도 나날이 지쳐갔다.

정생은 밤이면 예배당을 찾아 홀로 기도했다. “이 기나긴 고통을 끊어 주세요. 살려 주시든지, 아니면 빨리 죽여주세요”라고 빌었다. 추운 겨울 찬 마룻바닥에 앉아 있으면 계속 소변이 마려웠다. 그러다보면 새벽종이 울렸다. 신도들은 종소리를 듣고 새벽 기도를 드리러 왔지만 정생은 홀로 집으로 돌아갔다.

나중에는 화장실에 가는 것도 힘들어 깡통을 가지고 다녔다. 덜덜 떨며 기도를 하다 보면 “주여”대신 “추워”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어느날 차가운 바닥에 정신을 잃기도 했다. 정신을 차리면 바지가 온통 젖어 있었다. 우물가로 향해 가다 집 앞을 지나치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뒤꼍 뽕나무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흐느끼며 아들을 살려 달라고 빌었다. 한참을 기도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 정생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 권정생 선생의 유품인 성경책. ⓒ일러스트 추수밭 제공


정생이 처음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은 다섯 살이었다. 하지만 정생은 스무 살이 지나서야 예수님을 만나기 시작했다. 몸에서 병이 떠나지 않자 그는 간절히 예수님을 불렀다.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건강이 좋아졌다. 그는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교회 학교 교사도 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병은 다시 악화됐다. 기침할 때 피가 비치고 교회 학교 교사도 그만두어야 했다. 이때 정생의 아버지는 정생에게 출가할 것을 권유한다. 그리고 정생은 유랑길에 오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기도원을 찾았다. 하지만 자신만 돌보는 사람들로 가득 찬 기도원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정생은 기도원에서 나와 무작정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지생활을 시작한다.

홀로 얻어먹고 밖에서 자는 것이 무척 힘었다. 외로움 또한 견딜 수 없었다. 다행인지 가뭄에도 인정은 메마르지 않았다. 점촌이란 곳에 갔을 때는 열흘 동안 같은 식당에 밥을 얻으러 갔다. 주인 아주머니는 늘 웃는 얼굴로 깡통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아줬다.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먹지 못해 가로수 밑에 쓰러졌을 땐 눈을 뜨자 어떤 할머니가 두레박에 물을 담아 와 먹여주고 기운을 차릴 때까지 머리를 쓸어주며 옆에 앉아 있었다. 공짜로 강을 건네준 뱃사공 할아버지도 있었다. 곳곳에서 고마운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또 다른 예수님이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날이 밝아오는 것도 두려웠다. 죽을 생각도 했지만 그 결심들은 늘 다음 날로 미뤄지곤 했다. 석 달 동안 떠돌다 그는 부고환결핵이란 병을 또 얻게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새 고향과 가까워졌고, 정생은 집으로 향했다. 걸을 때마다 통증이 느껴지고 몰골 또한 말이 아니었다. 집에 남겨진 아버지와 동생에게 거지꼴을 보이기 싫어 냇물에 들어가 목욕을 했지만 아무리 씻어도 3개월의 거지 생활은 지울 수 없었다.

길 위의 시간들은 그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었다. 성경 말씀을 온 몸으로 체득했다. 굶주리고 헐벗으며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길 때마다 성경 속 인물들을 만났다. 예레미야, 아모스, 엘리야, 요셉, 세례 요한, 사도 바울을 만났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의 곁에 있었다. 그는 성경 속 성인들의 행적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집에 돌아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동생과 둘만 남은 정생은 건강이 더욱 나빠졌다. 이때 콩팥과 방광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고 소변 주머니를 달고 다니기 시작했다. 의사는 정생에게 앞으로 2년 정도 더 살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정생은 동요하지 않았다.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동생이 장가를 가자 정생은 살던 집을 비워줘야 했다. 정생은 안동군 일직면 조탑동 일직교회 문간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예배당 뒤쪽 흙담집이었다. 그곳에서 홀로 생활하며 예배당 종지기 일을 했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교회 종을 쳤다. 정생은 종을 울리기 전에 종탑 앞에서 기도하곤 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종소리로 가난한 이들을 일으켜 주십시오.”

그는 날마다 정성스럽게 종을 쳤다. 줄에 서리가 앉아도 눈이 붙어 있어도 살얼음이 있어도 맨손으로 줄을 잡아 당겼다.

몸은 여전히 아팠지만 정신은 갈수록 또렷했다. 그는 예배당 종지기로 있으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예수님의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늘 마음 속에 품고 살았다.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서러운 사람에게 서러운 이야기는 위안이었다. 정생은 슬픈 이야기를 썼다. 그러나 절대 절망적이지 않았다. 그는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누워서 지낸 그는 체중이 40킬로그램도 안 되는 몸으로 폐를 갉아먹는 균과 싸웠다. 폐결핵, 신장결핵, 늑막염을 한꺼번에 앓고 있었다. 스무 살 이후 몸이 한 번 성치 못한 그였지만 글을 열심히 썼다. 원고지 한 장을 쓰면 몇 시간을 앓았다. 또 하루를 쓰면 며칠을 꼼짝하지 못했다. 그가 쓰는 동화는 흡사 기도문 같았다.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다. 떠돌이 강아지였다. 예배당 문간방 앞을 서성거렸다. 정생은 자신의 밥을 덜어 강아지에게 나눠줬다. 하루는 강아지가 마당 한 편에 똥을 누었다. 그리고 강아지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강아지똥만 남았다. 무심코 넘겼던 그 강아지똥은 그에게 영감을 줬다. 수많은 떠돌이 강아지들의 똥이 거름이 되어 꽃들이 피어날 것이라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어쩌면 세상에 필요한 것은 황금 덩어리가 아닌 똥 덩어리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너도 꼭 무엇엔가 귀하게 쓰일 거야.”

동화 속에서 흙덩이가 강아지똥에게 한 말은 정생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후 정생은 아동문학계에 주목을 받았다. 수많은 아동문학상을 받았지만 그는 한결같이 상과 상금을 마다했다.

16년간 종지기를 하면서 그는 동화책 ‘강아지똥’, ‘사과나무밭 달님’, ‘몽실언니’, ‘하나님의 눈물’ 등을 썼다. 정생은 살면서 한 번도 흥정하지 않았다. 원고료와 인세가 수입의 전부였지만 주는 대로 받았다. 그렇게 모인 원고료와 인세로 60만 원을 들여 빌뱅이 언덕에 집을 지었다. 다섯 평짜리 토담집이었다. 마을과 떨어져 있어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벼르고 별렀던, 생애 처음으로 마련한 정생의 집이었다.

▲ 빌뱅이언덕 위의 토담집에서 권정생 선생이 활짝 웃고 있다. ⓒ일러스트 추수밭 제공


외딴집이어서 마음대로 외로울 수 있었다. 또 아프면 마음대로 찡그릴 수 있었고, 누구의 간섭 없이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비록 작은 집, 작은 방이었지만 정생에게는 우주같이 크고 편안한 공간이었다. 동화 짓기엔 더없이 좋았고 교회 종소리도 들려왔다.

그는 빌뱅이 언덕의 작은 집에서 동화만 썼다. 동화는 즉각 즉각 날개를 달았다. 그의 동화에는 유독 하나님, 예수님이 많이 나온다. 동화 속 하나님,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가장 약한 인간을 보듬고 있었다. 어느날 보니 그에게 명성이 생겨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인터뷰도 사양했다.

2007년 봄은 잔인했다. 정생은 몸이 너무 아팠다. 소변에서 피가 쏟아지고 통증이 심했다.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굶는 아이들을 걱정했다. 북측 아이들에게 인세를 보내 주라고 했다. 그리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기원했다.

10억 원이 넘는 인세를 모았지만 정작 자신은 고무신에 작업복만 입고 살았던 그였다. 그리고 큰 어린이 권정생, 그는 세상에 동화를 남기고 다시 그 동화 속으로 들어갔다.

지금도 빌뱅이 언덕에는 흙집이 서 있다. 댓돌 위에 놓인 고무신은 오늘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스스로 어린이가 되어 살았던, 지금은 ‘강아지똥별’이 된 권정생을 말이다.
ⓒ일러스트 추수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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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같은이야기 2013-09-26 21:18:32
선생님은 잠시 이 세상을 다녀간 성자이십니다. 그분 살아 생전에 무작정 빌뱅이 언덕배기 선생님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고무신 수돗가 꽃밭의 꽃만 사진으로 찍어 왔습니다. 우연히 그분과 마주치면 일생일대의 행운이겠다 싶었는데 그런 행운은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가까이에 인도의 '간디'같은 분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돌아왔던 나들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