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차례 화재, 모든 것이 불타고 “오직 하나님만이 남아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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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차례 화재, 모든 것이 불타고 “오직 하나님만이 남아계셨습니다”
  • 승인 2002.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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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 한 사람도 기립박수를 강요하지 않았다. 세종문화회관을 뒤흔든 사자후와 같은 아들의 웅변이 끝나자 청중들은 하나같이 모두 일어나 우레와 같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전국 남녀웅변대회에서 영예의 최우수상을 받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비오듯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아들을 부둥켜 안은 채 녀석의 일그러진 얼굴을 부벼대며 몽당손을 꼬옥 잡았다. 양 손가락 열 개를 하나도 남김없이 끊어낸 손이다.

남편과 아들, 죽음의 문턱까지
어디 손뿐이랴! 얼굴도 몹시 일그러졌다. 법정 2급 지체장애자인 큰 아들은 11살 되던 해, 중화상으로 다쳐서 얼굴은 물론 온 몸 55%가 흉터투성이다. 남편 김병열 권사도 그때 함께 다쳐서 역시 손가락 일부를 절단했고, 오른 팔의 기능을 잃은 5급 지체장애인이다. 얼굴도 일곱 차례의 피부이식 수술을 했지만 화흔은 아들이나 마찬가지다. 무섭게 활활 타오르는 불더미 속에서 검은 연기와 유독가스에 질식된 채 눈 깜짝할 사이에 숯덩이처럼 시커멓게 타버린 두 사람은 병원에서 산소 호흡기를 씌우고 삶의 마지막 수단인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그러나, 혈압은 자꾸만 떨어지고 몸뚱이는 서서히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그들은 세 번째 병원인 국립의료원에서 가까스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 후, 일 년 이상의 참혹한 병원생활로 불난 집마저도 팔았고 전 재산을 병원 치료비로 잃었으며 많은 빚까지 졌다. 뜻밖의 화마에 찢기고 할퀸 그들의 처참한 육신을 부여안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천성을 향한 형극의 20년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남다른 가난과 고통, 주위의 눈총, 멸시와 천대, 마냥 철저한 외면뿐이었다.
죽음이 마치 움직일 수 없는 부동(不動)이라면 부부자식 간의 신의와 사랑도 차마 미동(微動)조차 않는 부동이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퇴원 후, 나는 큰 아들이 다니던 학교 근처에다 월셋방을 얻고 불나자마자 시골로 보냈던 작은아들을 데려왔다.

당장 시급한 문제는 먹고 사는 일이었다. 난생 처음 생선장수의 길로 나섰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기가 무섭게 비린내가 물씬한 생선함지박을 이고, 연안부두 어시장으로 종종 걸음을 쳤다. 풋내기 생선장수의 온갖 설움이 겹겹이 쌓여가며 점차 이골이 났다. 그 후로도 채소장수, 음식점 종업원, 화장품 외판원, 노점상 등등 수많은 궂은 일을 해냈다.

비린내 나는 생선장수 등 20년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찾아와 격려해 주셨으며, 김장김치와 라면상자를 놓고 가시던 날, 우리는 그것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 부자라도 된 듯 싶었다. 얼마 후에는 영세민으로 지정되어 구호양곡과 연료비를 나라에서 받았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밥상에 둘러앉아 손을 맞잡고 네 식구가 올리던 감사의 기도는 한바탕씩 눈물잔치를 벌이곤 했다. 얼굴이 일그러진 아들은 손등뼈 하나를 빼내는 기가 막힌 재활복원 수술 끝에 틈을 내어 연필을 끼우고, 헝겊으로 묶은 다음 왼쪽 주먹손을 받쳐 간신히 글씨를 썼지만 말이 글씨지 그리는 데 불과했다. 옷도 입혀주고 밥도 먹여주며 심지어 화장실까지도 일일이 따라 다니면서 도와주어야만 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다보면 눈까지도 먼다는데, 눈이 멀면 귀라도 열릴 것이라는 소망 중에 그들의 육신이 얼음덩이처럼 차가우면 따스한 손길로 부둥켜 안아주고, 그들의 영혼이 괴로워 할 때면 하늘까지도 들릴 수 있는 간절한 기도로 애원할 것이라 수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신체 일부의 손상이나 결함으로 약함이나 불안을 떨쳐버리게 하려고 시간이 되는대로 나는 아들을 데리고 일부러 사람들이 많은 지하철역이나 시장, 백화점 등을 다녀 바깥 생활에 적응시키기도 했다.

숱한 시련과 고난을 하나님과 함께 한 장한 아들은 1등의 학업우수상, 모범 청소년상, 인천시 대표 웅변연사로 20여회 이상 전국대회를 재패했다. 필요할 때는 필요한 만큼의 용기,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는 의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 명철함을 원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감사했기에 더욱 사랑했는가보다.

비록 장애인이지만 학업 우수장학생으로 법과대학을 마치고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큰아들, 대학교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유수한 회사에 취업한 믿음직스런 작은 아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복음을 증거하는 신앙간증 전도집회 강사인 남편, 이제 나는 바랄 것이 하나도 없다. 두 아들이 자신에게는 물론, 이웃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위대한 신앙인이 되는 것뿐이다.

온 가족, 위대한 신앙인으로 우뚝
죽음을 거부한 극한 상황에서 사람이 생명을 연장받아 다시 산다는 것은 무거운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삶의 진정한 의미는 결코 부유나 행복에만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참된 사랑만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온 날들, 잠이 메마르고 귀울림이 계속되는 인고(忍苦)의 세월을 어느새 훌쩍 건너왔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지난날들에 그랬듯이 나는 그렇게 경건한 소망 가운데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더불어 살며 세상 끝날까지 사랑하리라. 두 아들의 손을 잡고 나선 외출길, 키가 큰 갈대숲을 지나는 9월의 상큼한 바람이 코끝을 찡하게 한다. 어쩌면 또 한바탕 눈물잔치를 크게 벌일 그런 날이 곧 올 것만 같다. 하늘이 높다. 하늘도 푸르고, 땅도 푸르고, 우리들 마음도 한없이 푸르기만 하다.

엄연호 권사(인천 부광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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