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그늘에 생명의 빛을, 카이퍼의 개혁주의 미학 (7) - 안용준 목사(목원대 겸임교수)
중심을 잃어버린 혼돈 속에서
우리 사회가 중심을 잃어버린 혼돈의 길에 들어선 것 같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돈다.
생명수의 공급이 중단되어 절망과 죽음의 저편에서 허덕이는 예술가들도 보인다. 예술현상을 그리스도와 전혀 관련 없는 것으로 보면서 질서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모습이 오늘날 예술적 풍토의 주류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살아있는 소망을 전해줄 수 있는지? 예술계를 포함하여 세상의 전후좌우를 둘러보아도 속수무책이다.
카이퍼에 의하면 믿음에서 출발하지 않고 예술을 주도한 사람들의 맹활약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로마의 예술과 르네상스의 예술에선 신앙의 열정과 추진력이 없어도 놀랄만한 미적 형상을 드러내는 예술양식이 존재했다. 로마인은 세계의 지배자가 되어 후세에 찬탄을 불러 일으킬만한 예술품을 완성했다. 르네상스인 역시 기독교문화와 섞일 수 없는 신비주의적 이미지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예가 많았다.
사실 오늘날의 예술도 예외는 아니다. 미술사상 초현실주의자들에게 가장 관심의 대상일 정도로 평판이 좋은 화가가 있었다.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다. 우리는 흔히 세상의 평판이 우리의 공허한 마음을 채우는 아름다운 열매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그럴까? 한 예로 그의 작품 <세 명의 무용수>를 살펴보자.
피카소는 자신의 이러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무용수들을 심하게 왜곡시켰다. 입체주의에서 유래한 까닭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인간의 이미지가 아니다. 인간의 주체가 완전히 해체된 듯 보인다. 사랑과 관심 속에 살아가야 할 인간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숭고한 영혼을 표현하는 율동을 상실하고 스스로 혼란에 빠진 모습이다.
인간은 누구나 피카소와 같은 대가(大家)라고 불리는 예술가의 작품을 보게 되면 ‘감정 이입의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또 그러한 인간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라고 착각을 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피카소의 작품처럼 폭발적인 인기의 정점에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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