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 대한 전적 신뢰를 배우는 곳은 광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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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대한 전적 신뢰를 배우는 곳은 광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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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1.10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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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직 교수의 십계명에서 찾아낸 그리스도인의 삶 (21)

                                     공동체와 영적 훈련소

▲ 백석대 조직신학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직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했기에,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지 못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블레셋 땅을 통과하는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시나이 반도 북서쪽 지중해 연안을 따라 가나안까지 이어지는 그 길은 고대 세계에 상인들과 군대가 자주 사용하던 길이었다.

최단거리로 간다면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는 약 322km밖에 되지 못하며, 3주 정도면 충분히 여행할 수 있는 거리이다. 그들이 그 길로 갔다면 빠르고도 편하게 이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합지졸이었던 그들이 강한 블레셋 군대 앞에서 겁을 먹고 이집트로 돌아갈까 염려하셨다. 또한 그들을 온전한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따로 훈련소가 필요했다. 그들이 시내산을 향해 걸어가야 했던 길은 거친 언덕과 바위, 모래, 산으로 가득한 광야였다. 그들이 시내산에 이르는데 40일이나 걸렸다. 또한 그들은 시내산 이후에도 40년을 그 광야에 있어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 모세를 따라 누구도 가보지 못했던 길을 갔다. 3일 후에 마라의 우물을 만나리라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우리가 한 번도 걸어가 보지 못한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 우리의 마음에는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한다. 미래에 대해 주어지는 약속이 확실해보일 때는 기대가 커지고, 힘든 상황이나 어려움이 닥치면 두려움이 커진다.

청소년들은 대학진학에 대해 염려하고 대학생들은 졸업 후 취직에 대해 염려하고 직장인들은 승진과 은퇴 후를 걱정하고 중년의 사람들은 건강을 걱정한다. 우리 일생에서 염려와 두려움이 없는 때는 없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광야를 경험할 때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혹독한 환경을 허락하셨나 하고 궁금해 한다. 때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기도 하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과연 이런 비극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기나 한 것일까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에게 닥쳐오는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미래를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최종적 미래로 우리에게 올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마라타나”,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라고 외치며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신부로서 살아갈 수 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들을 향해 나아가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였다. 그 신뢰만이 미래에 대한 그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었다. 그러한 신뢰가 있을 때 그들은 어떤 일을 만나도 불평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힘들어하기 쉽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육체에 가시, 즉 사탄의 사자가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서 떠나가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그의 간구와는 달랐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이 여러 계시를 받은 자신이 자만하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배려임을 깨달았다.

자신이 연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강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크게 기뻐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중심에 두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에 두었기에 자신의 시련과 어려움에 대해 감사와 감격으로 반응할 수 있었다.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이라면 다음과 같은 찬양을 드릴 수 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만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심도 감사”라고 노래할 수 있다.

온전한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을 정도로 괴로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지라도 큰 어려움 앞에서 흔들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보이셨던 절대적 신뢰를 우리도 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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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사탕 2013-01-16 04:56:03
광야 길을 걷는 것과 같은 우리 신앙의 길을 돌이켜보면 히11장(=믿음장)이 생각난다. 가나안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다. 오늘날 마지막 때에도 예수님은 교회들을 위하여 예수님의 사자(계22:16)를 보낸다고 하셨는데 오늘날 신앙인들이 믿음을 가지고 그 사자를 찾을려고 노력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