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카이아신앙고백이 정통 그리스도인들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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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이아신앙고백이 정통 그리스도인들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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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1.10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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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하 교수의 풀어쓰는 이야기 교회사 (21)

                                  니카이아회의와 신앙고백

▲ 백석대 역사신학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프로테스탄트교회, 로마 카톨릭교회, 그리고 정교교회로 분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사도들의 신앙고백, 니카이아 신앙고백, 아타나시오스 신앙고백, 이 세 가지를 공통으로 고백하고 있다.
 
4세기 중엽의 문헌상에서 온전한 사도들의 신앙고백이 증거되고 있고, 아타나시오스 신앙고백은 갈리아의 남부 스페인 지역으로부터 5세 혹은 6세기에 유래하였던 것에 비하여 니카이아 신앙고백은 325년 니카이아 회의에서 고백하였다.

니카이아 회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제국의 정치적인 평화의 시위를 이루기 원했던 감독들의 모임이었다. 니카이아회의는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회의를 참관하였던 황제의 압력이 작용하기는 하였지만 국가와 교회 사이에 조화를 이루게 된 사건이었다.

니카이아회의는 325년 5월부터 7월까지 3개월 동안 진행되었고, 서방지역을 대표하여 5명의 감독들이 회의의 대표로 참여했었음에도 교회사적으로 니카이아회의를 첫 공의회(전 그리스도교교회회의)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324년 9월 로마제국 동쪽지역을 통치하였던 리키니우스를 제압하고 제국의 단독통치자가 되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평화를 위하여 그 곳에 일어나고 있는 아레이오스 논쟁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325년 니카이아 회의가 소집되었다. 황제는 헬라어를 할 수 있었음에도 라틴어로 개회사를 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는 이 회의 도중에 자신의 통치 20주년 경축일을 맞기도 하였다. 황제는 회의에서 감독들이 논의하는 것들을 “참을성이 많게 모든 것을 경청하였다”(교회사가 에우세비오스). 물론 코르도바의 오씨우스는 황제의 신학적인 조언자 이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안타깝게도 니카이아회의의 회의록을 소장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회의 의장이 오씨우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니카이아회의에 참석하여 신앙고백에 서명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감독들의 수는 197명에서 213명 정도이다.

그러나 논쟁에 관하여 쓰고 있는 교부들의 글에서는 358년 말 혹은 359년 초부터 수가 갖고 있는 상징성 때문에 318명으로 고정되어 소개되고 있다. 이는 또한 역사적으로 니카이아신앙고백이 모든 정통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기도 하다.

니카이아 회의는 감독들의 회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레이오스 장로는 논쟁발단의 장본인으로써 회의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기회를 가졌다. 우리나라에 회자되는 교회사와 관련한 글들 중에 니카이아회의에서 상이본질론자들과 동일본질론자들이 팽팽하게 맞섰을 때 알렉산더 감독의 비서로 회의에 따라온, 집사이었던 아타나시오스가 유창하게 연설하여 동일본질신앙이 확립되었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후에 논쟁역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아타나시오스의 영웅적 역할을 니카이아회의에서 기대하기는 아직은 이르다.

니카이아회의는 주요하게 신앙고백을 작성하여 고백하는 일 외에도 제국의 동서가 차이를 보이던 부활절 절기의 날짜를 일치시켰고, 20개의 교회 계율을 만들었다.

니카이아 신앙고백의 작성을 위하여 몇몇 세례자를 위하여 사용되었던 3항으로 구성된 신앙고백서들이 감독들에 의하여 회의에 제출되었다. 그 중에 당시 예루살렘교회의 세례자들을 위한 신앙고백이 325년 초 안디옥에서 오씨우스가 주도했던 회의에서 준비하여 니카이아회의에 제출하였던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니카이아신앙고백의 토대가 되었다.

감독들은 충분한 논의를 통하여 기초한 신앙고백문에 아버지와 아들에 관계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아들이 “아버지와 본질상 같으시고”(호모우시오스)라는 내용을 추가 하게 되었다. 이 단어는 니카이아신앙고백의 표제어가 되었다. 그리고 논쟁역사를 통하여 정통 그리스도교의 표식이 되었다.

니카이아 신앙고백서에는 2명의 감독을 제외한 모든 참석 감독들이 서명하였다. 서명이 순조롭지 않았던 것은 표제어 호모우시오스 때문이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일본질이라는 신학적인 이해는 350년대 후반에 가서야 일반화 되었다. 그리고 성령까지 포함한 고백은 아타나시오스감독의 주도하에 열렸던 362년 알렉산드리아회의에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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