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포] 돌담길따라 걷다보니 제주 선교와 만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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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 돌담길따라 걷다보니 제주 선교와 만났네
  • 정민주 기자
  • 승인 2012.06.05 14: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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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선교, 그 강인한 역사가 담긴 ‘제주 기독교 순례길’로 오세요

제주의 ‘올레’ 길을 찾는 사람들이 매년 늘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인생의 교훈을 얻기 위해, 사색의 시간을 갖기 위해 등등 갖가지 이유로 올레 길을 찾는다. 제주 사투리인 ‘올레’는 차가 다니지 않는 작은 길을 말한다. 느리게 걷다 보면 작은 풀도 조그만 소리도 절경이 되고, 잃었던 여유를 찾게 된다.

그렇다면 제주의 기독교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길은 어떨까? 제주CBS가 작은 교회와 지역 사회를 살리기 위해 기획한 ‘제주 기독교 순례길’은 첫 신앙의 순결한 역사를 담고 있다.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척박한 제주 땅에 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파된 길을 걸으며 하나님을 묵상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숨겨진 제주 선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제주CBS와 함께 순례길에 올랐다.

# 제주 자생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순례길은 제주 서쪽의 애월읍 금성리에 있는 금성교회로부터 시작된다. ‘순종의 길’(1코스)은 첫 기도처, 금성교회 옛 예배당, 이도종 목사 생가, 조봉호 선생 생가, 한림교회 등을 거쳐 협재교회까지 총 14.2km의 길로 이어진다.

▲ 제주 최초의 자생적 교회인 금성교회
곽지과물해변 길을 지나 도착한 금성교회에서는 시골 교회만의 푸근한 냄새와 함께 순박하게 웃는 태종호 목사(금성교회 담임)가 우리를 반겼다. 금성교회는 독립운동가 조봉호 선생과 이도종 목사의 아버지 이덕련 씨 등이 함께 세운 제주 최초의 자생적 교회로, 제주 1호 목사인 이도종 목사가 어린 시절에 다니던 교회이기도 하다. 1924년 초가 예배당을 짓기 전까지 조봉호 선생, 이덕련 씨의 집에서 예배가 드려졌고, 현재 예배당은 1990년대에 지은 것이다.

태종호 목사는 “순례길은 제주를 방문한 사람들이 제주 기독교 역사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며 금성교회가 순례길의 출발점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 금성교회 옛 예배당 안에서 제주 기독교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태종호 목사.
돌담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금성교회의 옛 예배당. 1924년 이덕련 씨가 자신의 집을 내어 초가 예배당을 지었고, 1970년대에 다시 세워졌다. 녹슨 철문과 십자가가 보이고 여기저기 페인트가 벗겨진 옛 예배당에는 30여 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예배당 내부에는 강단 위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함께 동행한 태종호 목사는 “불신의 땅 제주의 많은 지역 가운데서도 금성리에서 지도자급 목사가 배출되고 제주 최초의 자생교회가 세워진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태 목사는 또 “1998년부터 금성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지만 제주 사람들은 마음을 잘 열지 않는다”며 사역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몇 년 전만 해도 교회에 나오지 않는 마을 사람들이 “아직도 계십니까? 언제 가세요?”라는 질문을 해왔다는 것.

그는 “이런 제주의 폐쇄적 특성은 4.3사건(1948년 4월 3일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제주주민의 항거에 미군정은 토벌대를 투입했고, 제주도 곳곳에서 유혈충동이 일어났다) 등 탄압과 억압의 길을 걸어온 제주의 역사와 관계가 있다”며 “그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도시 교회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삶이 전도가 되는 계속적인 교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얼마쯤 더 걸음을 옮기자 첫 기도처에 다다랐다. 교인 양석봉 씨의 집이 있던 자리로, 1907년 3월부터 이곳에서 기도모임을 가졌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에 들어와 첫 교회를 세우기도 전의 일이다. 독립운동가 조봉호 선생, 이덕련 씨 등 제주도민들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시작된 첫 번째 기도모임으로 금성교회가 시작됐다.

▲ 제주 1호 목사 이도종의 생가
이어 도착한 곳은 주변 밭에 조를 많이 심어서 ‘조팟동산’이라 불렸던 이도종 목사의 생가. 이도종 목사의 아버지 이덕련 씨는 어머니 송정순 씨를 따라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이 씨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멍석말이를 당하며 심한 핍박을 받았지만, 굳건히 믿음을 지켜나갔다. 이덕련 씨의 신앙은 그의 아들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아들 이도종 씨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제주 출신의 1호 목사가 되는 기쁨을 누렸다.

굽이진 돌담길을 지나 조봉호 선생의 생가에 도착했다. 제주독립운동의 상징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조봉호 선생은 3.1운동 때 제주에서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았다. 그러던 중 일본경찰에 붙잡혀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제주 사라봉 모충사에 기념비가 세워질 만큼 유명한 인물이지만,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음 목적지인 한림교회로 가는 길은 제주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해안길이었다. 바다내음이 물씬 풍기는 해안가에서는 우뭇가사리나 마늘을 말리는 제주아낙네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길을 걷다보니 시원한 바닷바람이 흐르는 땀방울을 식히며 지나갔고, 푸른 바다 속에서 전복이나 조개를 캐는 해녀들도 간간히 보였다. 넓게 펼쳐진 해변은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로 시끌벅적했다.

# 해안길 따라 만난 한림, 협재교회
▲ 한림교회
그렇게 마주한 한림교회는 1915년 이기풍 목사가 수원리 양운룡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됐다. 1919년 교인 김흥수 씨가 자신의 집 바깥채인 초가 6칸을 교회에 내어 수원교회가 세워졌다. 수원리의 예배처는 14년 동안 사용되다가 교인수가 늘어나면서 한림으로 옮겨 이름을 한림교회로 바꾸게 됐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일본군을 겨냥한 미군의 폭격으로 피해를 당해, 미군정청으로부터 옛 일본 신사터를 예배당 터로 받아 다시 교회를 세웠다. 현재의 예배당은 1987년에 건축된 것이다.

다시 해안 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순례길의 종착지인 협재교회. 1921년 당시 협재리는 300여 세대가 살고 있는 매우 큰 마을이었지만 토속신앙이 많기로 유명했다.

당시 모슬포교회 최정숙 집사의 도움으로 이도종 목사가 이곳에서 사역했다. 1948년 4.3사건 당시 예배당이 소각되어 개인주택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953년 피난민들의 도움으로 현재 터에 예배당을 신축했다. 이후 증개축을 통해 지금의 예배당으로 발전했다.

순례길을 뒤로 하고 숙소로 향하는 길에서 본 돌담은 이들 교회와 닮은 모습이었다. 고난과 모진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고 수백 년의 세월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돌담. 제주 기독교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였지만, 신앙을 지키며 순종하는 길을 걸어온 것이다.

이제까지 제주는 신혼 여행지나 단순한 관광지로 잠시 머물며 놀다가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순례길을 통해 전혀 알지 못했던 제주의 신앙, 선교, 기도의 이야기를 돌아볼 수 있게 됐다. 특히 잘 알려진 이기풍 목사의 제주 선교 역사가 아닌 제주의 자생적 기도모임으로 시작된 금성교회 이야기는 침체되어가는 한국 교회의 신앙을 일깨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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