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대상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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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대상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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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3.27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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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목사 (의왕중앙교회)

우리의 근대사회는 이념논쟁에 휘말려 서로를 죽이고 헐뜯고 희생된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이념논쟁에 휘말리면 모든 국민, 집단, 체계가 홍해바다 갈리듯 극단의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대책이 사라진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이건 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사고의 한계와 방향성을 달리하는 의식집단은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이 집단화되면 진보와 보수, 우파와 좌파 등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그 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와 종교에까지 영향을 미쳐 이념화되고, 굳건한 가치가 된다.

그 이념적 성향을 분류한다면 보수는 지난날부터 지켜 온 가치를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방향성을 가지며, 진보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발전시킴에 정력을 쏟는다. 우파는 성장과 번영에 중심을 두고, 좌파는 분배와 복지에 중점을 둔다. 우파는 개개인의 자유를 높여 나가는 일에 강조점을 두고, 좌파는 공동체성과 평등을 누림에 강조점을 둔다.

이는 어느 것이 옳고 그름이 아니다. 어느 사회나 그 사회가 바람직스러우려면 사고체계로서의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가 공존하며 상생, 경쟁, 견제하며 발전하여 나가는 것일 것이다.

보편적으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보수우파가 사회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이 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진보좌파가 사회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이 되어 왔다. 세상사가 다 그러하듯이 보수 우파에도 진보 좌파에도 제 각기 장단점이 있다.

가장 바람직스럽기는 양 이념체계에서 각기 단점은 버리고, 장점을 뽑아 균형 있게 사회와 공동체를 이끄는 것이겠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에는 어느 한 쪽으로 쏠림현상이 있기 마련이다.
진보 좌파는 탈권위주의와 정직 그리고 사회정의와 분배의 성향을 가지며, 보수 우파는 성장과 번영, 경쟁력 강화의 방향성을 가진다.

우리의 의식 속에 진보좌파하면 공산당을 연상하게 되고, 보수우파하면 개발독재와 수구라는 인식을 포함하고 있어서 우리는 마음껏, 그리고 선하게 이념적 논쟁을 펼침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태생학적 한계 안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보수와 진보는 서로를 보완하며 양립할 수 없는 이념적 체계인가. 자신을 과감히, 끊임없이 개혁하는 보수는 불가능한 것인가. 개혁을 실천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표현하리만큼 어려움을 실감나게 경험했고, 경험하고 있다. 그 어려움의 정도를 “달리는 자동차에 바퀴를 갈아 끼우는 것만큼 어렵다”고 실감나게 표현하는 이가 있기도 하다.

개혁이 더욱 어려운 것은 기존의 세력이나 기득권의 내려놓음과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적 모체나 개혁하는 주체 그리고 개혁의 대상 모두에게 희생과 피곤이 발생하며, 개혁의 끝과 결론이 없다는 사실이 개혁이란 말 자체에 염증을 느끼게 만들어 개혁의 어려움은 가중되고, 때로는 그 저항을 넘지 못하고 좌초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사회는 보수적 가치를 양보할 수 없으며, 개혁의 깃발을 내릴 수도 없다. 모순된 가치의 대립이라고 해도 보수적 가치 속에서 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 오늘의 우리현실 속에서 진보좌파를 용납하기가 어렵지만 수구적 보수(守舊的 保守)는 더더욱 안될 일이다. 되는 말인지는 확신 할 수 없으나 개혁하는 보수에 대한 기대를 가진다.

어느 공동체건 완벽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의 개혁된 사상과 삶 그리고 제도와 체계도 내일은 보수적이 되고, 또는 개혁의 대상이 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의 보수는 체계나 세력으로서의 보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적 교훈과 가르침을 지키는 것을 보수라고 하고, 말씀의 왜곡과 신앙의 세속화로부터 성경으로 돌이키는 태도와 행위가 개혁이라면 우리는 그 어느 것도 양보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된다.

이름만이거나 말의 유희로서가 아니라 진정 말씀으로 회복되고 회복을 시도하는 개혁교회를 꿈꾸며, 오늘의 나를 수술대 위에 뉘고, 거침없이 메스를 가하는 것은 새로운 나로 세워짐을 기대함이지 결코 분해나 해체 그리고 파괴와 무책임의 발로가 아니다.

누가 누구를 개혁할 것이며, 무엇이 무엇을 개혁할 수 있는가. 소리를 높여 외치나 권위는 인정하지 않고, 혹 권위를 인정하나 자신을 적용시키지 않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고,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여호수아처럼 오늘의 현실과 현상을 대항하여 나를 무릎 꿇리고, 세상에 대하여 외치나 자신에게 먼저 가혹한 개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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