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르포] 시내산 일출 보며 ‘모세의 소명’되새기다
상태바
[성지순례 르포] 시내산 일출 보며 ‘모세의 소명’되새기다
  • 이석훈 기자
  • 승인 2012.03.21 14: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구약의 출애굽 여정과 예수님의 발자취를 밟다 (중)

▲ 시내산에서 바라본 일출은 모세의 정기를 느낄 수 있기에 충분했다. 많은 사람들이 시내산 일출을 보면서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를 경험하고 있다.
모세가 소명·십계명 받은 시내산 압권-출애굽 기착지 느보산까지
에돔 중심지 페트라에 위압감 … 사해사본 쿰란에서는 새로운 희열


밤늦게 도착한 느웨바의 숙소는 홍해가 눈앞에 보이는 해변에 위치한, 그야말로 별장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저녁을 먹고는 시내산 등정을 위해 아쉽게도 바로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다.

# 시내산에서 바라본 일출
▲ 시내산 정상에서 방문객의 대부분이 예배를 드리면서 찬양과 기도를 하고 있다. 예장 백석총회 소속 선교사들도 예배를 드리고 기념촬영을 했다.
시내산이란 히브리어로 ‘가시덤불’, ‘쓰레기’란 뜻이 있고, 시내산의 또 다른 이름인 호렙산은 ‘건조한 곳’, ‘척박한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름 그대로 한 톨의 흙도 없이 온통 돌과 바위로 된 붉은 산이다.
손전등, 장갑, 점퍼, 운동화, 컵라면…. 시내산 등정을 위한 필수품이었다. 새벽 1시 반에 기상하여 버스로 40분을 이동 시내산 입구에 도착했다.

시내산은 성지순례 일정 중, 가장 긴장되었던 곳이기도 했다. 새벽 3시에 현지가이드와 함께 출발하여 약 2시간 반 만에 도착해보니, 이미 정상엔 여러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로 북적거렸다. 그래도 한국 관광객들의 감소로 인해 여느 때보다 한산한 편이라고 했다.

올라가는 길은 어둠 속에서 손전등 하나에 의지하고 앞만 보며 갔다. 낙타를 타는 경험을 하고 싶거나 등산을 하기에 역부족인 사람들은 22달러에 낙타를 타고 3분의 2 지점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정상에서 만난 시간은 거의 비슷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한라산보다도 더 높은 2,285m의 시내산에, 그것도 잠을 멀리하고 꼭두새벽부터 올라올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성경에 많은 산들이 등장하지만, 이곳만큼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도 흔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모세는 시내산에서 소명을 받았고, 출애굽 후에는 십계명을 받던 곳이요, 나중에는 성막을 처음 친 곳이다. 또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조사했고, 아비후는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그곳에서 멸망을 당했으며, 이세벨을 피해 엘리야가 숨었던 곳도 바로 이 시내산이다.

이렇듯 민족의 영웅인 모세를 통해 시내산은 이스라엘에게 삶의 근원과도 같은 성산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시내산 일출을 보기 위해 오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또 다른 감동을 주고 있는 곳이 바로 시내산인 것이다.

새벽 6시가 조금 넘으니 서서히 어둠을 걷어내며 하늘빛이 천하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장엄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에 사람들은 넋을 잃었고, 뒤이어 너도나도 그 광경을 필름에 담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곳 시내산 정상에서 예배를 드린다. 소규모의 중국인 성지순례객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예배를 드린데 이어 우리 일행도 서영오 선교사의 설교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또한 산 정상에서 시내광야와 미디안광야를 내려다보고 합심으로 기도하면서 모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정상 바로 아래 위치한 산장에서, 준비해 갔던 컵라면을 먹을 때의 맛은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꿀맛 그 자체였다. 따뜻한 물에 대한 대가로 지불한 2달러가 하나도 아깝지 않게 느껴졌으며, 차가워진 몸을 녹이는 데도 최고였다.

일출의 감동을 가슴에 새기고 하산할 때는 조금 험하지만 3천개 계단 길을 선택했다. 그 길은 오직 돌과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길이 아니라 마치 바위마다 얼굴이 새겨진 거대한 전시품 같았다.

광야는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고백한 사무엘의 기도를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었다.

광야(사막)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만한 시간이 우리에겐 부족했다. 그러나 광야의 여정이 우리네 인생의 여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짧은 그 시간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길이 끝날 즈음에 또 한 번의 감동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성 카타린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은 박해가 심하던 4C초, 용모와 학식이 뛰어난 귀족 가문의 여자 캐서린이, 황제 숭배를 우상으로 여긴 것 때문에 순교를 당하였는데, 그 때 천사들이 그녀의 시신을 이 산 제일 높은 곳(시내산보다 높은, 산 정상의 이름이 카타린산)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일행이 방문한 날은 금요일 안식일이어서 내부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 국경 통과하는 데만 반나절
한국의 성지순례객 10팀 중 8팀은 시내산 코스를 생략한다고 하는데, 이미 순교(?)를 각오한 선교사들이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의 염려와 기도 덕분에 무사히 시내산 등정을 마치고 이동에 성공했다.

▲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요르단 도시의 모습이 새롭다.
호텔로 다시 돌아와 쉬지도 못하고 다시 요르단으로 향했다. 홍해 연안의 바란 광야 길을 따라 홍해안의 휴양도시 누웨바를 거쳐 처음 이집트로 들어온 타바 국경을 통과해 이스라엘로 들어갔다.

이집트로 들어갈 때와는 사뭇 다른 긴장감 속에서 3시간을 기다린 끝에 이스라엘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다시 이스라엘에서 제공한 국경이동버스를 이용하여 아라바 국경을 통해 요르단에 입국했다.

이스라엘에서 요르단 남부 국경에 이르는 연결도로를 ‘에시온게벨’이라 부른다. 일행은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을 지나면서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에돔의 도시로 불리는 페트라로 이동했다. 페트라는 ‘베드로, 반석’이란 뜻으로 헬라어로는 ‘셀라’라고 한다.

에돔은 바로 구약성경 오바댜서의 중심 배경이 되는 곳이다. 오바댜서에는 본문 처음부터 에돔에 임할 심판을 선포하고 있다. 숙소이자 방문지인 페트라는 에돔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페트라’는 멀리서도 그 웅장함을 맛볼 수 있었지만 가까이서 접하는 순간, 협곡 자체에 조성된 모형과 인공으로 조각한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페트라를 설명할 때 1킬로미터 구간은 자연의 힘, 그 이후 1킬로미터 구간은 인간의 힘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암벽 사이의 좁은 협곡인 시크길을 걸어 들어가면 ‘보물창고’라는 뜻을 가진 ‘알카즈네’가 나온다. 높이 약 25m의 그리스식 건축 양식의 건물로 기원전 1세기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 인디아나존스 ‘최후의 성전’ 편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 옆에 있는 로마식 원형극장은 2세기 초 이곳을 지배했던 로마인들의 극장인데, 바위산을 깎아 움푹하게 만든 건축물로써 약 7천명의 인원을 수용하던 규모이다.

우리 일행은 그 웅장함에 놀라면서 곳곳에 자리한 신비한 자연을 사진에 담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원형경기장을 바라보면서 단체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페트라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나서 숙소 앞에 위치한 일명 모세의 샘이라고 하는 곳을 본 느낌은 약간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 에돔-모압-암만에서 세끼를
▲ 요르단에서 만난 아르논 골짜기는 미국의 그랜드 캐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구름기둥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페트라에서 다시 암만을 향해 왕의 대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아론이 죽었다고 하는 호르산과 미국의 그랜드 캐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 아르논 골짜기를 조망했다. 다시 일행이 향한 곳은 마케루스(세례요한의 순교지)였다. 이스라엘에도 세례요한의 순교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볼 때 정확한 근거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지 시간으로 토요일이었던 이 날은 아침은 에돔에서, 점심은 모압에서, 저녁은 암만에서 먹은 후 요단강을 건너 주일 아침은 약속의 땅에서 먹는 감격을 경험했다.

암만 숙소에서 주일 새벽에 주일예배를 드렸다. 모세기념교회가 있는 느보산에서 예배를 드릴 예정이었으나 현지 상황이 어찌될지 몰라 숙소에서 아침식사 전에 조봉현 선교사의 설교로 예배를 드린 것이다.

다시 이스라엘로 향하는 길에 느보산에 올랐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지난 후 가나안을 바라보고 죽었다(민 27:12~14)고 하는, 출애굽 여정의 마지막 기착지인 느보산(아바림산)에는 모세기념교회가 있었다.

일행은 비옥한 땅을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다시 한 번 한 목소리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도 후에는 주일예배에서 드려진 헌금을 요르단 현지에서 사역하고 있는 교단 선교사에게 전달했다.

낯선 땅 요르단을 뒤로하면서 다시 이스라엘로 향했다. 알렌비 국경을 통해 요르단을 출국하여 이스라엘에 입국하는 과정은 너무도 수월했다. 이스라엘에 들어서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유대인의 마지막 항전지인 ‘마사다 요새’였다.

BC 37년 헤롯왕이 요새이자 별장으로 만들어 놓았던 마사다는,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마지막 남은 960명의 유대인들이 항전 후 최후 자결함으로써 로마 군인들에게 수치감을 안겨준 곳으로, 이스라엘인들에게 항전의식을 고취시키는 성지가 되고 있다.

엔게디 골짜기를 지나 사해사본이 발견된 쿰란 공동체를 찾았다. 유대교의 한 조류인 에세네파가 쿰란공동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들이 금욕생활을 하던 정착지가 쿰란동굴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앞으로 도래할 종말에 대한 기대와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와 격리되려는 경향이 강했다.

유대독립전쟁의 와중에 로마군에 의해서 궤멸된 것으로 보이며, 이들 공동체의 유적에서 현존하는 구약성서 사본들 중 가장 오래된 사해사본이 1947년 한 목동에 의해 최초로 발견됨에 따라 자신들의 꾸란이 더 오래됐다고 주장하던 이슬람 세력에 반격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11개의 동굴에서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성경의 사본이 발견됐다고 하는 사실은 그곳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었다.

쿰란에서 조금 이동하여 사해 바다 체험을 했다. 일반 바다의 염도가 3%, 지중해는 5%인데 반해 사해의 염도는 30%로 수영을 못해도 물에 뜬다고 하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일행은 다시 선한사마리아인이 등장하는 여리고로 향했다. 그곳도 이스라엘 내에 9개의 자치시로 구분된 팔레스타인 지역이었으나 비교적 안전한 곳이어서 다른 느낌은 없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