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만 의지한 '75년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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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만 의지한 '75년 인생'
  • 승인 2002.08.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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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시 118:6) 의 말씀처럼 사람 눈치보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왔던 75년 인생을 소개한 홍찬환목사(75·흰돌교회)의 회고록이 출간됐다.

청렴과 결백,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일관했던 그의 인생살이를 모은 회고록,‘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광야의 여정’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어린 시절, 군복무 시절, 어려웠던 교회개척 시절, 한국교회와 총회, 신학교, 후배양성을 위해 한 평생을 보낸 홍목사의 인생을 이 한권의 책에 담아내기는 무리겠지만 그는 1천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글을 손수 집필하며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고스란히 펼쳐놓았다.

8살부터 출석한 임암(林岩)교회. 집에서 약 8km 떨어져 있는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어린 나이에 적지 않은 부담이었지만 주일학교 교사의 따뜻한 사랑은 홍목사의 신앙을 붙들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한번도 하나님께 등을 돌린적이 없었다.

홍목사는 피곤하고 가난한 피난민 생활 중에도 교회 생활은 열심이었다. 매주일 교회에 출석하며 뜨거운 신앙의 열정을 이어갔다.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을 지켰다는 성경말씀이 그대로 투영된 온전한 신앙인의 모습이었다.

도움을 호소하는 나라의 부름에 흔쾌이 응한 홍목사는 군복무기간 동안 그의 신앙은 한층 성숙해 졌다. 6.25전쟁이라는 생사를 넘나드는 절박한 상황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생명을 맡겼고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하겠다는 서원 또한 서슴치 않았다.

청렴결백한 성품탓에 군복무시절 각종 비리를 척결하는 일에 앞장섰고 신앙적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덕석교회와 임당교회 노관리교회 등 부임하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다. 혹한기가 되면 영하 20∼30도가 넘는 전방에서 드럼통으로 난로를 만들고, 생아카시아 나무 장작에 폐유로 불을 피워 추위를 이겨내며 그는 신앙을 지켜냈다.

성실을 재산으로 상관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홍목사는 월남 파병을 취소하고 장신대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장교신분으로 월남에 파병되면 부와 명예는 따논 당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신학교를 택했다. 현역군인의 신분으로 신학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했고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서울 사당동에 흰돌교회를 세워 그의 목회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40대 중반에 교회를 개척한 홍목사는 교회부흥에 전력했다. 매일 밤 이어지는 부흥회, 새벽기도 시간까지 계속되는 철야기도회가 흰돌교회 부흥의 원동력이었다. 달동네를 오르내리며 예수사랑을 몸소 실천했고 성도들을 위해 늘 헌신적이었던 홍목사는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교회뿐만 아니었다. 총회와 신학교를, 후배들을 위해서도 그는 항상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은혜, 예장합동진리와 합동 등 합동정통교단 탄생의 산증인인 그는 청렴결백과 저돌적인 성품을 인정받아 72, 73, 79회기 총회장을 맡으며 총회의 일꾼을 자청했다.

총회사업을 추진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소신으로 일관했다. 또한 총회관 구입, 기독정보사 설립, ‘5천교회 150만성도’의 5150총재, 기독교연합신문사 사장, 백석학원 25주년 행사진행 등 홍목사는 신학교와 총회의 가교역할을 하며 늘 궂은 일을 도맡았다. 홍목사의 이러한 헌신이 교단과 학교발전의 큰 밑거름이 된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30년 목회인생의 노하우로 회고록을 마무리하는 홍목사는 자신의 삶을 이 한마디로 정리한다. “나는 외모도 특출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공부를 특별히 많이 한 것도 없고, 뛰어난 재주도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생애를 나름대로 하나님 편에서 살려고 애를 써왔을 뿐입니다. 나의 생애는 간단합니다. 성장기와 22년간의 군인생활, 33년간의 목회생활이 내 인생의 전부입니다.”

김광오기자(kimk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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