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살리고 변화시키는 ‘생명의 말씀’의 성경관 회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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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살리고 변화시키는 ‘생명의 말씀’의 성경관 회복해야
  • 표성중 기자
  • 승인 2011.11.0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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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 그리고 한국교회(하) - 강단의 변화 없이 진정한 개혁 없다

▲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전 세계적으로 개혁과 부흥운동이 확산됐다. 개혁주의 설교가들은 열정적인 설교로 회개와 갱신을 촉구했다. 사진은 존 콜렛의 '설교하는 조지 휫필드'
올해로 494주년을 맞이한 종교개혁주일. 한국 교회를 향해 개혁을 촉구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세계교회사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발전과 성장을 이뤄냈지만 동시에 신학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들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며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과 신학적 유산을 바탕으로 성경적인 신앙으로 다시 돌아가 교회 갱신의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본지는 ‘종교개혁, 그리고 한국 교회’라는 주제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교회의 현재 모습을 진단하고, 개혁에 직면한 한국 교회에 가장 필요한 메시지는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교회사와 실천신학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의 주장을 통해 한국 교회가 추구해야 할 종교개혁의 신학과 신앙의 정신을 되살려보자 <편집자 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을 부흥이라 말하는 것은 기독교 본질 왜곡시키는 일
말씀 해석과 적용의 양극화 현상 극복 필요 … 청중의 거룩한 변화 도모해야
성령에 사로잡혀 죄악된 시대 품고 눈물로 회개하는 가슴이 있는 설교자 절실


# 하나님 말씀 앞에 선 설교자 칼빈
종교개혁은 말씀개혁 운동이었다. 개혁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전하면 사람들이 변화되고 사회와 세상이 바뀔 것을 믿었다. 마틴 루터는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성경을 번역했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설교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칼빈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칼빈을 위대한 신학자요 개혁가로 칭송하지만 칼빈은 스스로 목회자요 설교자로 여겼다. 칼빈의 제자 베자에 따르면 칼빈은 일년에 268번 설교를 했고 186번 강의를 했다.

▲ 류응렬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
칼빈은 목회자들을 위해 라틴어로 주석을 썼고 일반 신도들을 위해 프랑스말로 설교를 했다. 그의 주석에는 성경원어와 다양한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이 등장하지만 설교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운 문체를 사용했다. 칼빈은 하루 12시간 이상을 책을 읽고 주석과 설교 준비에 시간을 보냈다. 칼빈은 원고 없이 설교했지만 르구니에르라는 필사자가 칼빈의 설교를 전담하여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현재 2023편의 설교가 남아있다. 칼빈은 설교에서 ‘우리’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설교자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동일하게 서 있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칼빈 설교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에서 시작된다. 칼빈은 성경이 성령으로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으며 말씀을 바르게 풀어주는 것이 설교자의 제일 되는 목적으로 여겼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인 것처럼 말씀을 그대로 풀어주는 설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칼빈은 본문을 임의로 선택하지 않고 성경 한 권을 택하여 차례대로 설교하는 연속설교의 방법을 택했다. 그가 연속설교를 고집한 것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철저한 인식 때문이었다.

칼빈은 성경에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주해의 목적으로 삼았다. 본문을 대할 때 사변적이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찾으려 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칼빈의 신학사상은 그의 설교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시는 하늘의 은총이 모든 설교에 스며있다. 그렇다고 예수라는 이름이 모든 설교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창세기 설교는 예수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설교가 없지만 미가서나 다른 구약설교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반드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말씀을 풀어주는 것이 설교의 시작이라면 삶으로 연결시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설교의 방향이 될 것이다. 칼빈은 말씀이 반드시 적용될 것을 강조했다. 동일한 본문을 다루는 주석과 설교를 비교해 보면 설교가 세배 이상 길다. 주석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적용이지만 적용 없는 설교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설교를 자신의 삶에서 먼저 적용하기를 원했다. 그는 말씀을 전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씀을 지키기에 힘써 노력하지 않는다면 강단에 오르면서 목이 부러져 죽는 것이 낫다”를 읊조리며 강단에 올랐다. 진정한 개혁은 말씀에 기초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통해 완성된다.

# 설교의 총체적 변화 필요하다
칼빈의 설교를 보면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설교의 방향이 보인다. 개혁가들이 말씀에 근거하여 역사를 바꾸는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든 것처럼 이 시대 한국교회는 총체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강단의 변화 없는 진정한 개혁이란 불가능하다. 기독교회란 말씀과 더불어 일어나고 말씀이 사라질 때 무너진다.

첫째, 성경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성경의 무오를 믿는 신앙 위에 세워졌다. 성경이 생명을 살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다면 설교해야 하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진리가 사라진 설교는 하나의 윤리나 철학으로 전락한다. 성경관은 하나의 신학체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대한 자세가 설교자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진리의 말씀을 신뢰하는 설교자라면 말씀 앞에 꿇는 무릎이 있고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있고 영혼을 살리는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다. 죄악과 허물로 덮인 자가 감히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 받은 소명에 대한 감격으로 강단에 오른다.

유럽의 대부분 나라에 교회와 신학교가 문을 닫는 근본적인 이유는 성경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으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점점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상실하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개혁가들이 성경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조했다면 오늘 한국교회는 성경이 죽은 자를 살리고 살아난 자를 변화시키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성경관을 회복해야 한다.

둘째, 본문에 충실한 설교가 필요하다. 설교란 예수님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신다면 전하실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설교란 내가 본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본문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설교자는 태양이 아니라 태양의 빛을 받아 비추는 달이다. 설교자란 램브란트의 그림을 덧칠하는 사람이 아니라 충실하게 소개하는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교회 강단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정직하게 전하는 설교보다 사람의 귀를 시원하게 만들고 사람의 심금을 울려 교회로 몰려들게 하는 것을 유혹에 휩쓸려 간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을 목회성공과 부흥으로 직결시키는 현상은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일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에 절실한 것은 본문자체에 대한 충실한 해석이 있는 말씀이다. 기독교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이 변화된 사람들의 거룩한 공동체다. 설교자가 전해야 할 유일한 말씀은 주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필자에게 구약을 가르친 은사인 월터 카이저 교수는 수업 때마다 “한 손가락을 성경에 두고 설교하세요” 라는 말을 들려주곤 했다. 설교자는 예배당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다고 생각하고 설교해야 한다. 예수님이 나의 설교를 듣고 고개를 끄덕일 때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 설교다.

#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말씀 전해야
셋째, 청중의 삶에 적실한 설교다. 설교의 목적은 진리의 말씀으로 청중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체험하고 구원으로 인도하고, 믿는 사람들은 거룩한 제자로 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적용 없는 설교란 방향 없이 노를 젓는 사공과 같다. 칼빈은 모든 설교에서 청중의 삶으로 연결하는 적용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찰스 스펄전은 적용이 시작될 때 설교는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적용이란 설교에 덧붙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설교하는 목적과 직결된다.

한국교회 강단은 해석과 적용의 양극화의 현상을 보인다. 본문에 대한 설명만 난무할 뿐 삶으로 연결되지 않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설교와 본문은 사라지고 감동적인 삶의 이야기로 공허한 설교를 만들어 내는 현상이다. 적용이 말씀에 근거하지 않으면 결국 허약한 기독교를 탄생시킨다. 말씀에 근거하여 청중의 거룩한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 이것이 한국교회에 회복되어야 할 설교다.

넷째, 삼위일체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의 목적은 성경 기록의 목적에 근거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고 구원 받은 백성이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떤 말씀을 전해도 구원과 성화와 연결될 때 복음은 빛을 발한다. 구원과 성화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설교자는 말씀을 대할 때마다 본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살펴야 한다. 설교란 하나님을 먼저 발견하고 그 앞에 선 자신을 발견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는 설교의 한 방법이 아니라 설교의 철학에 속한다. 어떤 설교 형식을 띤다 해도 우리가 전해야 할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이다.

한국교회 강단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회중은 설교를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심장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오늘 설교를 마치고 돌아가는 청중의 가슴에 무엇을 남겼는지 물어보라. 하나님을 체험한 감격과 구원 받은 백성으로 부름 받아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결단을 가지고 예배당 문을 나서게 만드는 설교, 이것이 한국교회 강단에 살아날 때 한국교회는 새로운 종교개혁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령에 사로잡힌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설교자다.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설교를 잘 하는데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편의 설교보다 한 사람의 설교자에 더 관심이 있다. 한편의 설교를 잘 준비하면 한번 설교를 잘하겠지만 한 사람의 설교자로 세워지면 일생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게 된다. 어느 때보다 목회자들의 도덕과 명예가 땅에 떨어진 이 시대에 설교자의 영예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개혁도 부흥도 기대하기 어렵다.

종교개혁의 비결은 생명을 바치는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대로 살았던 개혁가들의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해 타오르는 열망을 지닌 설교자,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목자의 심정을 품은 설교자, 죄악 된 시대를 품고 눈물로 회개하는 가슴이 있는 설교자, 진리의 말씀으로 지옥의 문을 흔들고 사탄을 떨게 만드는 이런 설교자가 나타날 때 강단은 변화될 것이며 한국교회는 다시 한번 거룩한 불꽃으로 타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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