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케의 눈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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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의 눈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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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10.20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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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상기 목사 (예수로교회)

디케(Dike)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이다. 디케의 동상은 항상 눈을 가린 채 양손에 칼과 저울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공평무사와 엄정한 법의 심판을 상징한다. 우리나라 대법원에도 디케의 여신상이 대법정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한국 사법부의 여신은 눈가리개를 하지 않고 있다. 두 눈을 뜬 모습이다. 이는 실체적 진실을 두 눈으로 정확히 가리겠다는 사법부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여신의 눈을 지금 국민들이 의심하기 시작했다.

조선실록을 보면 세종대왕은 즉위 13년에 재판관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하여 교지를 내렸는데, 그 중에 정백허심(精白虛心)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 치밀하고 밝게 진실을 낱낱이 규명하되, 그 과정에서 마음을 비워 사심을 가지지 말 것을 당부하는 말이다.

이를 위해 세종은 늘 경연(經筵)을 주재하여 신하들과 함께 국가의 중요 문제를 논의하고, 법과 표준을 정하여 정의로운 사회의 기반을 다지며, 민족 문화의 꽃을 피워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의는 사회의 모판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정의의 근본적인 물음에 반드시 대답해야만 하는 순간에 맞닥뜨리게 된다.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교수는 정의를 판단하는 세 가지 기준으로는 행복, 자유, 미덕을 들었다. 정의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공정하고 올바른 상태를 추구해야 하는 가치다. 정의가 그 사람이 처한 입장에 따라 다르게 바뀔 수 있으며, 타인의 정의나 정의로움으로부터 파생된 결과에 대해 평가하는 우리네 기준이 때로는 매우 불합리하며,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해야하는 정의 모순이 공동선이 되기도 한다.

최근 광주 인화학교에서 실제 벌어진 장애 아동 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도가니’가 개봉되면서 은폐된 사건의 진실의 전모가 낱낱이 밝혀지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사회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곱씹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사학재단과 공무원들의 비리와 유착, 법조계의 전관예우 관행과 한국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들이 집중적으로 스크린에 프리즘 되면서, 법정이 정의를 실현하고 지키는 곳인지,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보루가 되고 있는지, 세상을 향한 소리 없는 약자들의 울부짖음이, 사회적 국민적 공분을 자아내고 법조계와 기독교계에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고 있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려고 싸운 게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그들을 바꾸지 못하도록 싸웠다고 증언하고 있다. 더구나 사건에 연루된 가해자들의 대다수가 교회의 중직자들이기에 우리들에게 주는 충격의 파장이 더욱 심각하다. 이는 결코 교회가 자유로울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자이크된 자화상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회 구조악의 현상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지 못한 세상속의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의 문제다.

로이드존스 목사는 교회는 미담을 만들어내는 곳이 아니며, 세상 사람들은 미담 때문에 예수를 믿지는 않는다고 했다. 교회가 인조된 행복으로 외식된 미담을 만들어 내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세속적 가치로 스스로 빛이 되려는 공명심을 버리고 하루빨리 십자가의 복음의 생명력을 회복하여야 한다. 교회가 세상을 부러워하고 세상이 교회를 부끄러워하면 마귀는 가만히 앉아서 쾌재를 부른다. 세상의 덫은 복음의 닻이다.

예수 안에 늦은 시작은 없다. 우리 모두가 정신 차리고 근신하여 심령부흥의 우물을 파야한다. 강단에서 무릎으로 생수를 퍼내야 한다. 디케가 눈을 부릅떠도 세상은 어둠이다. 디케가 눈을 가려도 진리는 생명의 빛이다. 코람데오(Coramdeo) 복음을 영화롭게 하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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