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 속에 누워 깨달은 생명의 소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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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속에 누워 깨달은 생명의 소중함
  • 이덕형 기자
  • 승인 2011.08.31 17: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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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사랑 밤길걷기’ 체험르포

해질녘서 동틀때까지 2011 생명사랑 밤길걷기
1만 5천명 생명의 따뜻함으로 서울시 메우다


지난달 26일 서울 시청 앞 광장. 많은 사람들이 미리 마련된 각기 다른 부스 앞에서 자살예방 캠페인 참가를 위해 줄 서 있었다. ‘해질녘에서 동틀 때까지 2011 생명사랑 밤길걷기’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올해로 6회를 맞이한 이번 행사는 가족단위 참가자를 비롯해 학교, 동아리, 친목단체, 기관 및 개인 등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참가자 1만 5천명이 운집한 가운데 진행됐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일본의 NPO 법인인 ‘일본 자살자 유가족 종합지원센터’에서 참가해 일본과 한국의 자살자 유가족들이 함께 걷는 ‘소중한 동행’도 진행됐다. 이날 교사 인솔 하에 참여한 중고등학생 청소년들은 생명존중과 자살예방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과 이벤트에 참여했다.

# 34분 후 한 생명이 사라진다
‘생명사랑 밤길걷기’ 문구가 적힌 흰색, 남보라색, 주황색 티셔츠가 시청 광장을 형형색색으로 수놓았다. 수많은 참여자들의 관심이 말해주듯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 2010년 한해만 15,413명이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매일 43명, 34분에 한 명씩 스스로 세상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우리나라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사실. 청소년 자살자 수가 전년대비 40%나 증가했다는 통계는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자살 원인으로는 성적 및 진학문제가 51%, 외로움 13.6%, 친구 간 불화가 6.6%를 차지해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인 것으로 드러났다.

1백여 명의 제자들과 함께 대회에 참여한 화곡보건경영고등학교 상업교사 권태외 씨는 “특성화고등학교인 우리 학교에는 가정적으로 어려운 학생이 많이 있다”며 “학생들이 대회 참석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 따뜻한 생명사랑 체험이벤트
청계천을 걷다보니 삼삼오오 모여든 청소년들이 있었다. 이들의 발길을 사로잡은 곳은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부스였다.

생명사랑그래프, 자살통계지도 및 자살과 관련된 자료가 전시된 ‘생명사랑체험관’에서 길게 늘어진 줄을 따라 한걸음씩 앞으로 나가다 보면 다트를 던지는 청소년들이 있었다.

다트가 꽂힌 부분에는 행동 지시사항이 적혀있었다. 봉사자가 지시사항을 설명하면 그대로 수행하면 되는 이벤트다. 한 예로 지시사항이 ‘생명사랑 전화번호 외치기’면 그것을 크게 두세 번 외치는 것.

다음 장소에는 ‘새드스톤 이벤트’ 공간이 있었다. 글자 의미 그대로 미리 마련된 조약돌 위에 싸인펜으로 자신이 잊고 싶어 했던 슬픈 기억들을 적은 뒤 물속에 가라앉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자신을 붙잡고 우울하게 하는 기억들을 조약돌에 옮겨 물 속에 가라 앉힘으로써 아픔을 승화하고 자신은 새롭게 한다는 내용의 프로그램이다. 새드스톤 위에는 ‘아이들한테 매를 들었을 때’, ‘꾸중 들었을 때’, ‘학교에서 혼났을 때’, ‘잔소리 듣고 성적이 잘 안 나올 때’와 같이 다양한 사연들이 적혀 있었다.

▲ 아픈 마음이 적혀있는 새드스톤
새드스톤 진행자는 “단순하고 재미있는 이벤트이기도 하지만 아픈 기억에서 벗어난다는 암시와 믿음을 스스로에게 주는 과정으로 정신의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새드스톤 과정을 다 작성한 사람들은 포춘쿠키를 하나씩 받았다. 행운의 과자, 포춘쿠키 속에는 그날 하루 기분 좋게 하는 행운의 메시지가 들어있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머물렀던 곳 중 하나는 임종체험관. 사랑의 밤길 걷기에 참여하기 전 참여 방명록에 이름을 올린 참가자는 걷기대회를 마친 뒤 임종체험을 15분 간 할 수 있다.

임종체험관 내부는 실제 장례 장소와 똑같이 꾸며져 있다. 화환과 19개의 관, 그리고 이미 세상을 등진 유명인들의 초상화, 체험관 전체에 가득 찬 향 냄새와 계속 울려 퍼지는 장례곡. 피부에 와 닫는 직접적인 체험을 위해 마련된 수의와 관도 실제 장례식에서 사용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임종체험을 진행한 서비스119아카데미의 정숙일 대표는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며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죽은 뒤 사람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수의 한 벌과 관 하나가 전부”라며 “비좁고 불편한 관 속에서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불편은 작은 것이며 이 기회를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는 말을 전했다.
▲ 15분간 진행되는 임종체험실에는 19개의 실제 관과 국화 꽃이 체험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서울시 밤길을 수놓은 생명 발걸음
저녁 7시 52분 ‘생명사랑 밤길걷기’ 행사 10km 코스 참가자들의 출발이 있었다. 시청 광장을 따라 남녀노소 모두 모여 남대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어 5km코스, 34km 참가자들이 출발선상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생명사랑 밤길걷기’ 행사는 어둠 속을 걷고 있을 때 결코 혼자가 아님을 상징한다. 밤길을 걸으며 어둠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삶의 소중함과 생명의 역동성을 느껴 생명 존중과 사랑을 함께 나누는데 취지가 있다.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시청광장에서 덕수궁 길을 따라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에서 다시 돌아오는 짧은 코스와 시청광장에서 남산, 청계천을 따라 한강과 서울숲을 거쳐 다시 시청으로 이어지는 긴 코스로 나눠졌다.

이번 행사는 유난히 가족별 참여자가 눈에 많이 띄었다. 부모와 자녀들이 손을 잡고 서울시 밤길을 적게는 2시간에서 길게는 8시간 가량 함께 걸었다. 가족들과 함께 생명존중 영상 ‘소중이와 미모사의 생명이야기’를 본 후 밤길 걷기에 참여한 ‘샤프론 봉사단’의 유진희 주부는 “남편과 함께 속 깊은 이야기도 나누는 기회도 되고 아들과도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뜻 깊은 시간이 되었다”며 밤길 걷기에 의미를 부여했다.

가족과 함께 밤길 걷기에 참여한 이승철(18세)군은 “단순한 걷기 행사에 그친 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며 “생명 소중함을 주위에 알릴 수 있는 피켓도 여러 개 제작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사회캠페인적 특징을 조금 더 살려야 하는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밤길 걷기를 완주한 사람들은 시청 광장에 따로 마련된 부스에서 종이봉투에 자신의 꿈이나 바람인 라이프 메시지를 적었다. 봉투 안에 빛나는 작은 전등은 광장 주변에 대형 하트 모양을 이루며 놓여져 생명을 사랑하는 참가자들의 마음을 모아 전했다. 

 

자살, 잃어버린 내일을 말한다
스기모토 나오코 씨, 대화와 치유가 절실


▲ 생명사랑 밤길걷기에 참여한 난부 세츠코(오른쪽 두번째)가 자신의 경험을 전했다.
“인간은 사는 것이 전제이기에 죽음을 생각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죽고 싶을 만큼 고민이 있었더라면 먼저 저에게 상담해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늘 곁에 있는 사람은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하고, 비로소 죽고 나서야, 아 그게 사인이었구나라고 알아차리는 것이 자살입니다."

‘일본자살자유가족협회’ 난부 세츠코(66세,여) 씨는 2004년 2월 11일 자신의 손으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남편을 회상하며 담담한 얼굴로 자살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세츠코 씨는 한국만큼이나 자살률이 높은 일본에서 지난달 26일 ‘2011 생명사랑 밤길걷기’에 참석하기 위해 동경에서 스기모토 나오코 (68세, 여)와 함께 시청 앞 광장 잔디를 밟았다.

자살률이 높지만 일본에서는 자살이 금기시되어 있다. 가족 중 자살자가 나오면 자살자 본인은 물론 가족들마저 죄인의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 자살자는 의지가 약한 사람을 넘어 비겁한 사람으로 인식되어 세상에 태어난 흔적이나 의미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 자살자유가족 종합지원센터’의 임원인 두 사람은 가족을 잃은 경험이 있는 자살자 유가족이다. 한국의 자살자 유가족과 함께하는 ‘소중한 동행’에 참여하기 위해 온 그들은 ‘생명사랑 밤길걷기’에 참가했다.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남산 북측 순환도로로 장춘단공원을 지나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통해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에 함께했다.

“일본에서 자살대처기본법이 2005년 시행된 이후 자살 관련 심포지엄이나 강연은 많이 있었지만 이런 대대적인 사회적 캠페인은 없었다”는 나오코 씨는 “‘생명사랑 캠페인’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지 믿어지지 않는다”며 감탄을 표현했다.

“경제적 어려움, 가족 해체, 독신 인구의 증가, 개인주의 만연 등이 고독은 고립으로 연결되어 자살로 이어진다”고 말하는 나오코 씨. 자살률 증가의 원인으로 그는 ‘단절’을 꼽는다.

나오코 씨는 “자살률이 증가하고 반복되는 것은 자살이 남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인식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했다. 대화와 치유가 절실히 필요한 자살자 유가족은 사회 속에 고립되는 경우가 많다. 자살로 발생되는 이런 함정들은 다시 가족의 자살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가져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자살의 함정에 빠졌을 땐 주위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그 때가 바로 비슷한 경험을 겪은 사람과의 대화와 상담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보통 자살자 유가족은 어려운 상황일수록 의도적으로 분위기가 더 밝고 쾌활한 곳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금물이다. 마음에 쌓인 아픔과 고통은 이와 같은 과정으로는 치유되지 않는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억지로 쾌활하고 밝은 분위기만 찾아가는 것은 오히려 아픔과 슬픔을 더 증폭 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는 ‘일본자살자유가족협회’ 측은 “한국과 일본 사람들은 힘들 때 도움을 청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며 “중요한 것은 마음에 서로 공감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대화가 필요한 것으로 너무 힘들고 지칠 땐 상담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고희를 바라보는 나오코 씨와 세쯔코 씨는 많은 나이로 ‘일본자살자유가족협회’ 활동에서 물러나려 했는데 이번 한국에서 개최된 ‘2011 생명사랑 밤길걷기’캠페인의 참여와 호응을 보고 놀라 일본에 돌아가 캠페인의 개최와 자살방지 활동을 위해 더욱더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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