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성경학교 특집-"문맹퇴치에서 영혼구원까지" 부흥 이끈 80년
상태바
여름성경학교 특집-"문맹퇴치에서 영혼구원까지" 부흥 이끈 80년
  • 승인 2002.06.1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교회의 여름성경학교가 80돌을 맞았다.
성경암송, 새벽기도, 율동, 푸짐한 선물, 주일학교 축제 등 주일학교 부흥의 대명사인 주일학교가 예년의 명성을 잃고 있다는 평가다. 예년에 비해 어린이들의 참여율도 떨어지고 있으며, 교회 형편에 따라 기간도 4-5일에서 2-3일로 줄고, 새벽기도프로그램도 참여율 저조로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초기 여름성경학교는 교회뿐만 아니라 기독교학교, 그 지방의 기독교계 인사들이 폭넓게 참여하여 지역사회의 모든 시설을 이용할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80년의 역사를 지닌 여름성경학교 주일학교를 성장시킨 원동력이었다. 성경공부, 성경암송, 찬송, 위생, 음악, 일화, 수공, 유희, 체조 등으로 4주 동안 진행된 초기 여름성경학교는 놀이 문화가 부족했던 아이들, 학업에 목말랐던 어린이들을 사로잡았다.
한국교회 최초의 여름성경학교는 1922년 서울 정동교회에서 교사 5명, 학생 1백명으로 시작한 ‘하기아동성경학교’. 그 해 평북 선천에서 마펫선교사 사모가 여름성경학교를 시작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와 별도로 1923년 서울 중앙 YMCA는 ‘아동성경학교’라는 이름으로 시작했고 그해 7월에는 서울시내 8개소에서 여름성경학교를 실시해 여름성경학교의 부흥을 맞기 시작했다.

그 당시 주일학교연합회총무로 선출된 김기연목사(감리교)는 전국 교회를 순회하며 하기성경학교를 보급했는데, 1924년 하기 사업 보고에 따르면, 전국에 하기학교가 49곳, 교사는 1백54명, 학생은 3천여 명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대위, 김기연이 중심이 된 하기성경학교는 가정형편상 취학하지 못한 학령아동들을 대상으로 방학동안 빈 학교를 이용해 하기성경학교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각 전문학교와 중학교에 재학중인 학생들이 교사로 봉사했다.
정동제일교회의 하기성경학교가 체육, 음악, 성서, 위인전, 수공, 사회봉사 등 문맹 퇴치와 하나님 나라 시민 양성, 영혼구원에 목적을 두었다는 점에서 이같은 사실을 엿볼 수 있다.
1924년 이르러 전국으로 확산됐다. 평북 선천의 남·북교회와 남·녀 기독교청년회, 전도회 등은 각각 하기 아동성경학교협회를 조직하여 읍내 명신학교와 성경학교 교실에서 1개월간의 대대적인 하계학교를 열었다. 이밖에도 충남, 강경, 강화, 인천, 원산 등 여러 지방으로 번져 나갔다.

한국의 하기성경학교는 당시 세계 선교 지역에서 가장 돋보여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사실 이런 단기간의 발전은 각 교회 청년, 고등학생, 대학생들의 열성에 힘입은 것으로 1937년에는 학교 9백45곳, 학생 7만5천1백54명, 교사는 5천2백40명에 이를 정도였다.
일본의 식민지 하에서 어린이들을 수용할 교육 기관이 적었던 1930년대 당시 세계하기성경학교협회 부회장이던 윤치호박사는 하기성경학교에 대해 “오늘날 조선의 사정으로 보아서 배울 것이 있고 얻는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이다.
여름철을 이용하여 어린이들에게 글도 가르치고 종교의 훈련도 주는 이 운동은 우리로서는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미미한 것 같으나 하나님과 동역하는 큰 사업이다”라고 평가해 하기성경학교가 매우 유용한 자리였음을 보여 주었다.

해방 후, 여름성경학교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갖추었으며, 교단은 자체적인 여름성경학교의 교과 과정을 정하고 공과를 자체 제작했으며, 교단, 노회, 연회별 교사강습회를 개최하여 개교회의 여름성경학교 프로그램을 지원하게 이르렀다.
최근의 성경학교 경향은 과거에 비해 교육 내용이나 교수방법에는 상당한 진전을 보여 주고 있으나 초기 여름성경학교가 지녔던 지역사회에 대한 호응과 참여에 크게 미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송영락기자(ysong@ucn.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