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박두성선생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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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박두성선생의 생가
  • 승인 2002.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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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 상용리의 달우물 마을에 가면 낮으막한 산밑에 1937년에 세워진 교동교회(사진)가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오래된 가옥이 한 채 남아 있는데 이곳이 바로 한국 시각장애인들에게 최초로 점자를 만들어 공부를 하게 하고 성경을 볼 수 있게 한 송암 박두성 선생님의 생가이다.

특히 박두성선생님의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쌍한 사람,특히 시각장애인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치유를 하여주신 생애처럼 귀한 인생을 사신분이다. 박두성선생은 1888년 4월26일 태어나셔서 1895년부터 4년간 강화도의 보창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으시고 그후에 한성사범학교를 다니신후에 어의동보통학교 교사로 교육자의 길을 시작하셨다.

특히 보창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 지도자를 키우던 성제 이동휘선생이 박두성선생께 암자의 소나무처럼 절개를 굽히지 말라고 송암이라는 호를 지어주셨다. 그리고 일제가 조선인 유화정책의 하나로 설립된 조선총독부내의 제생원내의 맹아부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송암선생이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이때부터 송암선생은 맹인들을 위한 교육에서 애로점을 파악하기 시작하여 먼저 교육의 기본자료인 교과서의 필요성을 인식하시고 1913년 8월14일 일본에서 점자인쇄기를 들여와서 한국 최초로 일본어 점자교과서를 출간하였다. 그리고 송암 산생은 제생원에 부임하신지 7년이 지났으나 한글점자가 없음을 안타까워 하셔서 1920년부터는 본격적인 한글점자연구를 시작하셨다.

제자인 이종덕,전태환등 8명과 같이 "조선어점자연구회"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여러번의 시행착오와 끊임없는 연구로 드디어 1926년에 드디어 한글점자가 완성을 보게 되었다.
송암은 완성된 점자를 "훈맹정음"이라고 칭하고 1926년 11월4일에 전국에 발표를 하고 매인들에게 취지문을 발송하였다. 그리고 송암은 점자를 만들고 이것을 보급하기 위하여 숨어사는 맹인들에게 찾아가서 점자교육을 받으라고 설득을 하였고 지방에는 통신교육을 실시하고 읽을 거리를 계속보내주셨다. 또한 송암 선생은 맹인들에게 주판교육을 강조하셔서 생활교육도 잊지 않으셨으며 각종서적의 점자번역과 성경전서,이광수전집,명심보감,천자문,이솝우화,등 맹인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점자로 번역하시는 생애를 사시다가 1963년 8월25일 76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셨다.

송암선생이 인천에서 점자를 연구하시다가 눈이 아프시면 생가가 있는 교동도에 오셔서 생가의 틀에 있던 우물물로 눈을 씻으시셨는데 이 우물을 달우물이라고 부르고 있다. 십여년전에 바로 이 달우물 자리에서 온천에 솟아올라서 지금은 마라쓴물 온천이라고 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송암 박두성 선생은 특히 신약전서를 점자로 번역하여 맹인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신 업적은 한국교회의 자랑이기도 하다. 그래서 금년 4월을 문화공보부 제정 4월의 한국인으로 선정되어 송암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가 교동도의 생가와 늘 기도하시던 교동교회에서 대대적으로 준비되고 있다.

찾아가는 길:강화도 창후리에서 교동가는 배를 타고 교동에서 상용리까지는 걸어서 30분 걸린다.

박은배<고양외고 교감, 기독교유적답사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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