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굴한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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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한 화자
  • 승인 2002.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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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물이 다 만든 이가 있고 주인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주인된 자기를 표시하기위해 도장을 찍기도 하고 서명(signature)을 멋들어지게 휘갈겨 쓰기도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건의 소유자나 소유주체를 분명히 나타내는 다양한 장치나 법 제도와 기구들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는데 반해 대화(dialogue)나 대중연설(public speech)에서는 이상하게도 겸손이라는 미명아래 자신의 존재를 슬그머니 감추고 누구의 생각이고 말인지를 애매하게 표현함으로 내용에 대한 책임을 면하려는 비굴한 스피치 기법이 우리사회에 퍼져가고 있다. 말하는 이가 자신의 말에서 생각의 주체자를 제대로 표시하지 않는다면 이는 듣는 이를 무시하는 무책임한 처사가 될 것이라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이러한 예 중의 하나는 오늘날 스피치에서 문장이나 말의 끝을 맺는 종지어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지나친 수동형 종지어를 쓰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학자들이 견해를 발표하는 경우나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교회의 여러 가지 행사나 예배시에 하나님에 대한 겸양과 때로는 청중들이나 교인들에게 점수를 따고자 하는 계산된 이기심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청중이나 설교를 듣는 교인들 중에 화자에게 이익이나 불이익의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끼어 있는 경우라면 그런 경향이 더 강할 수도 있다.
다음의 문장들의 분위기를 비교해 보기로 한다. 예. 1 : 이번 사건은 우리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 2 : 이번 사건은 우리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오게 되어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 3 : 이번 사건은 우리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오게 되어질 것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예. 4 : 오늘예배가 은혜로운 시간이 되어지게 해 주시고… 예문 1은 너무나 흔하게 보는 표현이라서 별로 어색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말하는 사람이 주체적으로 여러 가지 상황과 조건을 고려해서 판단하는 화자의 주관적인 입장보다는 제 3자적인 상황으로 인해 피동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예문 2를 보면 ‘불러오게 되어질 것이라고’나 ‘생각됩니다’가 같이 어울려서 뜻은 이해가 되지만 필요 없이 ‘되어질 것’이라는 수동형을 사용하여 부드럽게 흘러가는 문장의 줄기를 비틀어서 매우 어색한 말을 만들고 있다. 예문 3번을 보면 이것은 어색한 정도가 심해서 쓰지 않으면 더 좋았을 ‘생각되어집니다’라는 수동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말한 내용에 잘못이 발견되었을 때에 책임을 회피할 근거가 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듣는 이에게 기분좋은 인상과 감동을 주기에는 미흡하다.

1, 2, 3번의 예문을 좀더 준비되고 자신있는 설교자나 화자(speaker)라면 어떻게 말할까? 그러한 화자는 자신감과 신뢰감을 주기 위해 ‘이번 사건은 우리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4번의 예는 하나님께서 오늘 예배가 은혜롭게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것을 굳이 ‘되어지게’라는 표현을 할 필요가 있을까? 이 말은 ‘오늘 예배가 은혜로운 시간이 되게 해주시고…’라고 한다면 복잡하지 않고 문장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하면서도 듣는 이의 화답과 ‘아멘’을 힘있게 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교묘하게 책임을 전가하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풍조가 정치, 경제, 사회, 심지어 종교계에까지 만연된 배경중 하나가 주체자를 감추는 비굴한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기법에 있는 듯 해서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우리의 밝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분명한 주체자가 나타나는 당당한 스피치를 하는 스피커(話者)가 우리사회와 교회에 점차 많아지면 좋겠다.

박찬석(천안외대 영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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