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수의 구약 읽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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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수의 구약 읽기(12)
  • 승인 2005.01.03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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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수 교수/강남대 구약학


아브라함은 백 세에 아들을 낳고 마지막 시험대에 오른다.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여 이삭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니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모리아산에서 독자 이삭을 결박한 후에 칼을 들고 죽이려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고 찬사를 보낸다거나 부러워해서는 결코 안된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 그토록 항의하던 아브라함의 모습은 간 데 없고, 아들을 죽여야만 하는 아브라함의 처량한 모습만이 우리 눈에 아른거릴 뿐이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까?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을까? 성서기자는 왜 이런 끔직한 시험 과정을 독자에게 알리려 하고 있을까?


고대 사회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친 흔적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비록 인육 제사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환영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통용될 때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주변국으로부터 이러한 풍습을 전수 받은 것 같다. 사사 입다가 하나님께서 원하지도 않은 인신 제사를 서약하여 자기의 무남독녀를 제물로 바친 이야기라든지(삿 11장), 왕국 후반기까지 어린이를 불사르거나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종교적 풍습을 볼 때 인신 제사는 한 때 이스라엘 민중 사이에 알려져 있었다(왕하 17:31; 23:10).


아브라함이 인신 제사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가 가나안의 인신제사 풍습에 익숙했다는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성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이야기를 어떻게 전수 받았을까? 우리 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삼국유사’(5권)에 나오는 ‘손순매아(孫順埋兒) 설화’는 손순이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자식을 죽이려고 한 이야기이다. 아이를 땅에 묻으려고 할 때 땅 속에서 석종(石鍾)이 발견되어 그 종 때문에 아이도 살고 온 가족이 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세계 도처에 널리 퍼져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지극한 정성과 믿음은 하늘을 움직여야 하는데 그 방법은 오직 생명을 바치는 일 외에 없다는 사고방식은 고대인에게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명보다도 귀한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에 항의 한번 못하고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고 순순히 따라 나서는 이삭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이삭은 자기를 태울 나무를 지고 산을 오를 정도로 성장했지만, 백 세가 훨씬 넘은 아버지를 거역하지 않고 순순히 결박당한다. 하나님은 이삭 대신 숫양을 준비하심으로 이삭의 생명을 구하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지켜졌다는 내용이 창세기 22장에 소개되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우리의 생명처럼 귀하다는 가르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사건으로 소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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