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 인물 : 하란사 1875-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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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인물 : 하란사 1875-1919
  • 승인 2005.01.19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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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 미국 학사학위 취득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배움에 대한 열정을 키우며 일본유학을 마친데 이어 미국에까지 유학해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하란사는 기독교복음을 통해 개화여성을 배출하고 교회지도자를 양성한 초기 교육계몽가요,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남겼다.


 

그녀가 출생한 시기는 1875년으로 격동의 시기였으며 김해김씨 가문 출생이란 것 외에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단지 기혼남과 결혼, 전처의 소생으로 1남3녀가 있다는 점만 전해질 뿐이다. 교회사가 이덕주목사는 “후처로 결혼한 것은 적어도 양반가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추측한다. 여하튼 하란사라는 이름은 미국이름 ‘낸시’의 한글이름으로, 1896년경  이화학당에 입학할 무렵 지은 이름이다. 그녀의 학구열에 감탄한 남편의 허락으로 찬란한 학구열을  태울 수 있었다.


남편은 인천에서 고위 세무공무원직인 ‘감리’위치에 있어 물질적으로 비교적 넉넉했다. 1900년에 일본에 유학한데 이어 1902년에는 미국 오하이오 주 감리교계통의 웨슬리안대학을 졸업,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인물로 기록되는 영예를 안았다.



남부럽지 않은 공부를 마친 그녀는 1906년 11월에 시작한 상동교회의 성경학교를 맡아 선교사 스크랜튼과 함께 사역했다고 한다. 이 학교는 후에 협성여자신학교로 발전했다가 현재의 감신대로 성장했다.



하란사는 이화학당에 대학과정이 개설되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교사직을 수행하며 엄격한 교육지침을 적용, `욕쟁이 선생‘이란 별칭을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화학당의 주임교사였던  프라이 선생은 하란사를 가리켜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 달려가는 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표현했다. 



총명했던 그녀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의 비밀결사회원으로 파송받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민족적인 거사는 수포로 돌아갔으며 이에 절망한 하란사는 중국에 갔다고 한다. 목적이 불분명한 중국방문 중 그녀는 식사 중 사망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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