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으로 하나님 사랑을 전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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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으로 하나님 사랑을 전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 현승미
  • 승인 2009.10.0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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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각장애인을 위해 수화통역하는 조 태 순 목사

“남편과 소통하기 위해 수화를 배우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곧 하나님이 저를 위해 예비해두신 길이었습니다. 아니 세상과 소통하길 원하는 수많은 농아인들을 위해 준비해 두신 것이지요.”

아세아농아인선교교회 조태순목사. 그는 70세가 넘는 나이에도 농아인협회 관악지부장으로, 수화통역센터장으로, 한국여성장애인연합회 농아여성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그 누구보다 열심을 다해 농아인을 섬기고 있다. 농아인을 섬긴지도 벌써 30년이 넘었지만, 그의 뒤를 이을 마땅한 후임자를 찾지 못해 선뜻 손을 놓을 수도 없다.  


● 19살 꽃다운 나이에 이웃 청각장애 청년과 결혼

6남매 중 첫째로 태어나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했던 살림꾼이었던 조태순목사. 그는 보릿고개로 아버지와 산에서 도토리를 따다 우려서 보리와 함께 끓여먹던 시절에도 구걸하러 다니는 이들에게 쌀과 집안 음식들을 내주었다.

“동네에 성경책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는데, 우연히 그분에 새벽 5시에 놋그릇을 훔쳐가는 것을 목격하게 됐어요. 어린 마음에 사람이 가난하면 도둑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집안 어른들에게 꾸지람을 들으면서도 집에 구걸하러 오는 이들을 모른척 할 수 없었어요.”

영특하고, 남의 어려움을 돌보아 줄 수 있었던 따뜻함을 지닌 그는 아버지의 주선으로 열 아홉 꽃다운 나이에 이웃집 청년에게 시집을 가게 됐다.

“저는 당시 멀쩡한 정상인이었고, 그 이웃집 청년은 청각장애인이었어요. 그때는 유교사상이 강할 때라 아버지가 사주팔자에 대해 집착 하고 계셨는데, 어릴 적에 집 앞을 지나가던 점쟁이가 저에게 시집을 세 번 갈 팔자라고 했대요. 그 일을 마음에 두고 계셨는데, 이웃집 청년은 사주를 보니 너무 좋더라는 거예요. 처녀가 총각한테 시집 가는게 어디냐며, 두 말 할 것도 없이 저를 그 청각장애인에게 시집 보내셨지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생활력이 강했던 그는 결혼을 해서도 시어머니와 남편을 섬기는 데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그러나 남편은 술만 먹으면 폭력을 행사했다.

“제가 손재주가 좋아 평소에도 십자수를 놓거나 손뜨개를 해 벽보나 베갯보, 앞치마, 식탁보 등을 잘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미싱일을 시작하게 됐는데, 어느 날 남편 친구가 와서 힘들게 모은 돈을 몽땅 가져가 버렸어요. 남편과 싸움이 났지만, 오히려 남편이 맞는 억울한 일이 있었죠.”

술만 먹고 오면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을 보면서, 그리고 억울한 일이 생겨도 자신의 권리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남편을 보면서 그는 수화를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 남편소통 위해 수화배운 후 변화된 삶

“당시만 해도 통역사는 거의 없었고 책도 자료도 없었지만 하나하나 사물을 보면서 기회 되는대로 닥치는대로 열심히 배웠습니다. 어떤 형제의 도움으로 농아협회에도 들어가게 됐습니다. 밤이 다 가는 줄도 모르고 수화 공부에 열중했는데 워낙 열심히 한 덕분에 수화 실력이 빠른 시간에 눈에 띄게 늘어 나중에는 수화로 생활하는 농아 남편보다 수화를 더 잘 할 정도가 됐지요.”

하지만 농아협회에서 글을 배우는 동안 그는 예기치 않은 싸움에 휘말려 한쪽 청각을 잃게 됐다.

“한쪽 청각을 잃게 되는 사고로 농아인협회에서 일을 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장애인이 됐다는 것 때문에 자괴감에도 시달렸지만, 오히려 농아인들의 어려움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됐지요. 나중에야 귀가 이렇게 된 것도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었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술주정뱅이 남편을 통해 그를 교회로 인도하신 것이다.

“어느날 남편이 맨정신으로 집에 들어와서는 교회에 가자고 하더라고요. 자기가 자꾸 술 먹고 저를 때리는데 교회에 가면 술 끊고 안 때릴 수 있으니까 하나님을 믿어보자고 하더군요.”

그렇게 반신반의하며 당시 조용기목사가 시무하던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에 다니게 됐다. 그러나 술주정뱅이 남편이 하루아침에 변할리 만무했다.

1년여가 지나면서 조태순목사의 신앙은 빠르게 성장해갔지만, 그럴수록 남편의 횡포는 심해졌다. 교회에 다니면서 자신과 있는 시간이 적다는 이유였다.

“그때가 70년대 초반이었는데, 교회에 말하는 사람보다 말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였어요. 교회에서 구호 물자를 준다니까 농아들이 몰려왔고, 미국 선교사가 빵과 옷을 나눠줬지요. 한마디로 얻어먹으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 교인이 되는 사람들이 꽤 많던 시절이었지요.”

절대적으로 수화 통역사가 부족했다. 그는 조용기목사의 설교를 통역하고 있었는데, 교회에서 사역을 하던 미국 선교사가 학비를 대줄테니 정식으로 신학을 배우라고 권유했다.

“아무래도 신학을 배우면 목사님의 설교가 더 정확히 전달 될 수 있을테니까요. 처음부터 신학이 제 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중간에 휴학을 했지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좇았기 때문일까. 그는 교통사고로 둘째아들을 잃는 사고를 당했다. 뺑소니였다. 아이를 치고 달아난 차 운전자는 찾을 수 없었다. 황급히 수술을 했지만, 아이는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그 뒤 조태순목사는 3년을 자신의 죄로 자식을 잃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했다.


● 시련 속에서 만난 하나님위해 남은 삶 바쳐

“웃음도 잃고 막대기 같은 심정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꿈에 최자실목사님과 조용기목사님이 우리 집에 심방을 와서 일어나 기도하라고, 주의 종이 왜 포기하고 좌절하고 있는냐고 야단을 치셨어요. 놀랍게도 그 이후 우울하고 슬펐던 감정들이 빠른 속도로 회복이 됐지요.”

아이를 잃은 슬픔을 달래면서 그는 기지촌 농아여성들을 위해 사역을 시작했다. 1979년 여의도순복음교회 안에 사회사업선교회가 창립되면서 그는 농아부 창립 멤버로 일하게 됐다. 농아부 사역을 하면서 신학교에도 복학해 학업을 다 마치고 84년에 졸업했다.

아세아농아인선교교회 사역은 그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은퇴한 1996년 다음해에 시작됐다. 7명으로 시작된 첫 예배.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사랑한단 말 한마디 들을 수 없는, 그래서 가슴 터질 것 같은 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하나님은 저에게 두 손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손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게 하셨지요. 저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다면 언제까지나 이 사역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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