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 (2) - 박철구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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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6.25 (2) - 박철구 장로
  • 정재용
  • 승인 2008.06.19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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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악 된 모습까지 사랑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민족되길"

“주여! 이 땅의 전쟁이 속히 끝나게 해주시옵소서. 주여! 주여!”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경상북도 경산의 한 꼬마는 이른 아침 화장실을 가다 새벽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을 보며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처음으로 느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그 꼬마를 통해 부모님과 8형제를 주님 품으로 인도하셨다. 6.25전쟁 당시 초등학교 5학년 꼬마였던 시조 시인 박철구장로(충현교회). 어린이의 눈으로 바라 본 전쟁은 끔찍했지만 기도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은혜도 있었음을 전했다.

 “전쟁이 터지던 날이 주일이라 학교도 가지 않고 과수원의 잡초를 메고 소에게 풀도 먹이다 돌아오니 동장이셨던 선친께서 전쟁이 났다고 하셨어요. 며칠이 지나자 마을 청년들이 모두 입영했고 비행기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리고 라디오에서는 군가와 전쟁소식이 들리며 피난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후방 산골에 있던 박장로의 가족들은 갑작스런 전쟁으로 급박하게 돌아갔던 전방보다는 조금 여유가 있었지만 남쪽으로 밀려드는 피난민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저희 집에 50여명이 피난을 왔었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쉴 곳을 제공하고 함께 항아리의 된장, 고추장을 나눠먹으며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죠. 그런데 그중에 장로님이 한분 계셔서 새벽마다 예배를 인도하며 함께 기도를 드렸었어요.”

새벽녘 화장실을 가다 엿들었던 기도소리는 엄격한 유교집안에서 자란 꼬마 박철구의 마음에 아주 크게 자리 잡아 예수님에 대한 갈증으로 이어졌다.

어릴 적 교회에 가면 선물을 많이 줘서 막연하게 따라다녔다는 박장로는 전쟁 중에 드리는 기도들을 하나님께서 듣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한번은 비행기가 뜰 수 없을 정도로 비가 많이 와서 전국의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부산 초량교회에 모여서 ‘일주일만 비가 그치게 해달라’고 철야금식기도회를 했었어요. 이후 비가 그쳐서 비행기가 뜰 수 있었고 수세에 몰렸던 국군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 비가 그칠 때가 돼서 그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피난 중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없어서 못 먹는 밥을 굶어가며 하는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초등학교 5학년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기도도 계속 됐다. “처음에는 청년들만 입영을 했는데 나중에는 장년들도 포탄과 음식을 운반하려고 모두 전쟁터로 나가게 됐어요. 식량과 물자들 모두 전쟁터로 징발되어 여자들과 노인, 어린이들만 남아서 식량난과 질병에 시달리기도 했어요.”

이웃마을 영천에 비행기가 질서정연하게 연출해내는 폭격장면을 산위에서 바라봤던 꼬마 박철구. 수많은 생명들이 시커먼 연기 속에서 죽어가는 참혹함으로 머릿속에 기억되며 자연히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모으게 했다.

“전쟁은 정말 비참했어요. 서로 죽고 죽이면서 쉴 새 없이 터지는 폭탄은 산의 높이를 낮아지게 하고 국군과 인민군이 수차례 번갈아 점령을 하면서 결국 한반도를 승자도 패자도 없는 폐허로 만들며 분단의 역사가 시작됐으니…” 되돌아보면 씁쓸하기만 한 전쟁. 다행히도 그렇게 끝난 전쟁의 기억 가운데 기도의 능력을 깨닫고 예수님을 찾게 된 것은 정말 큰 축복이었다.

전쟁으로 사라진 학교를 떠나 나무 밑에서 그리고 천막 밑에서 공부에 열심을 냈던 꼬마 박철구는 고향에서 유일하게 당시 명문이었던 경북중학교에 진학하고 경북대 국문과에 입학하면서 하나님을 더 가깝게 만나게 됐다.

“1959년 추석, 사라호 태풍으로 나라가 또 한번 떠들썩했을 때였어요. 초등학교 친구의 인도로 부흥회에 참석을 하게 됐는데 그 곳에서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고 말씀을 사모하게 됐죠.”

뜨거워진 마음이 식지 말라고 하셨던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군에 입대한 박장로에게 군종실 하사관으로 군대생활을 하게 하시면서 말씀을 더욱 사모하도록 인도해주셨다.

하지만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가족과는 멀어지고 있는 듯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던 박장로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기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유교사상을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께서는 성경책을 일곱 번이나 불태우셨어요. 그래도 저는 주일이면 새벽같이 교회로 나가서 저녁 늦게까지 기도하는데 힘쓰려고 노력했죠. 제삿날에도 그랬고요.”

8남매의 장남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큰 불효였으나 가족들은 결국 박철구장로의 기도로 모두 예수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물론 동생들이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됐어요. 캐나다에 살던 셋째 동생은 7년 전 필리핀에 선교사로 파송 받아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고 있어요. 동생을 통해 병든 자를 고치시는 기적까지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감사 또 감사할 뿐이에요.”

형의 인도로 하나님을 만났던 동생. 하지만 이제 형이 동생으로부터 선교의 도전을 받게 됐다. 집안 형편으로 대학교를 마치지 못했던 박장로는 요즘 때 아닌 학구열에 불타있다.

“대학교 2학년 때 군대를 다녀와서는 공무원 시험을 보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었어요. 나중에서야 방송통신대, 성경통신대를 하며 그때 못했던 공부의 한을 푸는 것 같았는데 끝이 아니었나봐요. 하하하.”

10년 전 공직에서 물러난 뒤 장로로 교회를 섬기고, 시조 시인으로 작품 활동에만 전념했던 박장로는 가까운 시일에 동생처럼 선교사로 남은 생을 헌신하려고 영어공부에 매진하고 있다고 했다.

“늦은 나이일 수도 있겠지만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구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해주신다면 참 감사할 것 같아요. 선교영어가 생각보다 어렵더라고요. 부족한 것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기를 기도하며 준비해야죠.”

기도의 능력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영접했기에 박장로에게 기도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칠순을 바라보며 자녀들에게 청년들에게 박장로가 강조하는 것은 오로지 기도 하나 뿐이다.

“6.25전쟁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다 듣고 계셨음을 확신합니다. 새벽기도를 통해, 목사와 장로들의 합심기도를 통해, 또 인천상륙 작전으로 유명한 맥아더장군의 기도,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가 쉬지 않고 기도하기에 이렇게 사랑해주고 계신지도 모르겠어요.”

분단의 역사가 곧 마감하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전한 박철구장로는 한국의 청년들이 새 역사를 기도로 준비해 멋지게 만들어 나가기를 소망했다.

“어려움에 처한 북한을 사랑으로 돕고 기도해주며 통일을 준비하는 나라를 그려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한마음 한 뜻으로 모아져야 할 때, 무엇보다 청년들의 기도가 우선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청년들이 힘과 뜻을 모아 하나님의 뜻을 바로 세우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나라를 만들어서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전쟁의 기억으로 아픔도 크지만 죄악 된 인간들의 모습까지도 사랑으로 감싸주심을 체험한 꼬마 박철구. 어느 덧 칠순을 바라보게 된 지금,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사랑을 모두 베풀고 주님 곁으로 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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