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선조들의 깊은 신앙심 아래 뿌리내린 나라사랑
상태바
신앙선조들의 깊은 신앙심 아래 뿌리내린 나라사랑
  • 현승미
  • 승인 2008.06.02 13: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호국보훈의 달 6월 -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찾아서

때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5월 12일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찾았다. 탁 트인 거제 바다를 끼고 달려 도착한 탓인지, 포로수용소라는 중압감 때문인지 입구에서부터 숨이 ‘탁’ 막히는 듯 했다.


60여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전쟁과 반공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희미해져가고 ‘호국보훈의 달’이라는 명목만이 남아있는 이때 의외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은 사람들로 붐볐다. 아니 주변 초등학교 운동장을 빌려 주차를 대신해야 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잔존건물 일부만 곳곳에 남아 있는 이곳은 당시 포로들의 생활상, 막사, 사진 의복 등 생생한 자료와 기록물들을 바탕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유적공원으로 다시 태어나 전쟁역사의 산 교육장 및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조성하게 됐다.


1983년 12월에 경남 문화재 자료 제 9호로 지정되면서 거제시는 유적관 옆 일대 1만 5천여 평에 새로운 전쟁기념관을 완공해 지금은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국가공휴일인 탓에 삼삼오오 가족단위로 온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70세가 넘은 할아버지는 자신이 젊은 시절 겪었던 그 참혹한 전쟁을 떠올리며 상처를 치유하는 시간이었다. 7살 손자는 입구에 전시돼 있는 커다란 탱크에 이미 마음을 뺏긴지 오래다. 포로수용소라는 단어조차 이해하기 어린 나이지만, 그저 책에서만 보던 커다란 탱크, 비행기, 총기류에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2살 어린 손녀는 피 흘리며 울부짖는 포로들의 모습에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30대, 40대 젊은 삼촌과 엄마, 아빠는 사는데 바빠 잊고 있었던 그 민족비극을 떠올리며 말문을 잇지 못한다. 60년 전 그 참혹한 현장을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가슴에 새긴다. 그저 오랜만의 가족 나들이라 생각하며 가볍게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찾았지만, 생생한 고통의 현장에서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의 남침 선봉에 섰던 소련제 T-34탱크 모형 안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현장. 포로생활관, 포로생포관, 포로수송, 여자포로관, 포로사상대립관, 포로폭동체험관, 포로설득관, 무기전시장까지 당시의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생생하게 체험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많은 포로가 생겨 부산·경북 등지에 분리 수용했으나 시설이 부족했다. 1950년 11월 27일 거제도 고현·수월·양정·상동·용산·해명·저산 지구를 중심으로 360만 평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 이 시설에 인민군 15만, 중공군 2만, 여자 포로와 의용군 3천 명 등 최대 17만 3천 명을 수용했다. 그 당시 거제에는 주민 10만 명, 피난민 약 15만 명, 포로 17만 등 약 42만여 명이 거주했다.


1983년에 건립된 유적관에는 그 당시의 사진과 장비 및 의복 등이 전시되어 있고 6·25전쟁과 포로수용소에 대한 영화도 부분적으로 제작 상영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 수용소 130만 평에 설치되었던 시설 전부를 축소 건립되었으며, 수용소 내부건물도 축소·복원되었다.

▲ 전쟁 발발 직후 대동강을 건너던 이들이 다리가 끊겨 당황해 하는 모습을 재현

수용자들이 생활했던 낡은 천막 안에는 머리, 다리 등 몸 이곳저곳에 부상을 입고 피에 물든 붕대를 감은 수용자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재현돼있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 천막 내부에서는 매캐한 곰팡이 냄새가 가득하다. 화장실은 노천에 큰 항아리를 올려놓고 그 위에 널따란 나무 천막 두개를 덧댄 것이 전부다.


이곳은 말 그대로 6·25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민족역사교육 장소였다. 그러나 사람이 모이는 곳은 어디든 복음화의 열정을 잠재울 수 없는 법. 그 처참한 현장에서도 복음화의 불길은 막을 수 없었다. 미군이 관리하면서 군목에 의해 정규예배를 통한 복음화 사업이 전개된 거제도 포로수용소. 이들 포로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성경연구반은 수용소 복음전도의 주축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민간포로들의 조속한 석방, 계속되는 다툼 가운데 포로 구분 수용 등을 제안하며 포로들의 인권을 위해 앞장서기도 했다. 또한 함께 성경공부를 하며 복음전도를 했던 이들 중 다수가 대통령 이승만박사의 애국반공포로 석방조치로 풀려난 후 정규신학교를 졸업하고 무려 160여명이 목사가 되기도 했으며 전도사를 포함하면 200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6.25 한국전쟁의 역사는 결코 기독교의 역사와 떨어져 볼 수 없다. 한국전쟁 시절 수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나라와 교회를 지키기 위해 순교했고,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 앞 장 섰던 이들 대다수 역시 기독교인이었다. 호국보훈의 달 6월, 나라의 아픈 과거와 믿음의 선조들의 깊은 신앙심 아래 뿌리내린 나라사랑. 국내 선교유적지와 호국보훈 유적지를 찾아 다시금 지금 우리가 가져야 할 나라사랑관과 신앙관을 되새겨 보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