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두 다리를 잃었지만 하나님은 더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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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두 다리를 잃었지만 하나님은 더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 현승미
  • 승인 2008.04.23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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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장애 극복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가교 역할 하는 주 은 미 사모

 “조금 불편하지만, 괜찮아요. 그래도 걸을 수 있잖아요. 일할 수도 있고,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도 도울 수 있어서 행복하답니다.”

매일 아침 여느 직장인들처럼 만원 지하철에 시달리며 출근해야 하지만, 그것마저도 즐겁다는 주은미사모(수서 은혜교회)

그는 스무 살 시절 불의의 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잃었다. 총신대 신학과 합격통지를 받고 시골 친척들에게 인사를 드리러 다녀오는 길이었다.

“새해 첫 주일이라서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밤 기차를 타고 급하게 올라왔어요. 새벽녘 기차에서 내리다가 추락해 그대로 20m가량을 끌려갔죠. 누가 봐도 죽었다 싶을 정도로 온 몸이 피투성이었는데, 그 와중에도 제가 이름과 집 연락처를 불러줬대요.”

다행히 2시간 만에 집에 연락이 닿아 급히 수술을 할 수 있었지만, 대형사고였다. 머리의 큰 혈관이 지나가는 곳을 다쳤다. 머리를 감쌌던 손은 물론이고 두 다리는 기차 바퀴의 굴러가는 속도에 못 이겨 모두 달아버린 후였다. 6시간이 넘는 대수술이 이어졌다.

“그때 철도지정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온 몸 전체를 살피지 않고, 당장 눈에 보이는 머리와 다리만 수술을 했던거죠. 알고 보니 요추가 나가서 신경이 눌린 상태였어요.”

마비가 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골절된 척추에 교정기를 세우는 수술을 해야 했다. 한 여름에는 또다시 욕창으로 고생하다가 상처가 깊어져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정확히 12월 26일 스무 살 생일이었다.

“고통이 너무 심해 잠조차 편히 잘 수 없었죠. 그때는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었죠. 내가 사람다운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긴걸까? 아프고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야했지요.”

그 고통 가운데 주은미사모는 말씀을 붙잡았다. 오직 하나님께 기도했다. 

“모두들 관심어린 표정으로 저를 위로해 주었지요. 하지만 아무도 소망이 있다고, 비전이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항상 병상 옆에서 말씀을 암송해주셨는데 그게 힘이 많이 됐지요. 퇴원 후 집에서 거울에 비친 비참한 제 모습을 보게 됐는데, 그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깨닫게 됐어요.”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예레미야 29장 11절 말씀이 떠올랐다. 지금의 모습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고 소망이라는 하나님 말씀을 한 번 더 믿어보자고 다짐했다. 하나님이 다음 것을 보여주시리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는 사고 후 꼬박 1년 만에 복학을 하게 됐다.

같은 해 남동생이 같은 학교 신학과에 입학을 했다. 교육자의 길을 가겠다던 동생이 스스로 택한 길이었다. 등하교길을 함께했고, 공부하는데도 서로 도움이 됐다.

“불편하지만 걸을 수 있다는 기쁨 주신 열매에 감사하게 됐어요. 제 자신 많이 부족했지만, 하나님은 그때그때 제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셨지요. 제 기도를 외면치 않으셨지요.”

자신의 몸이 불편하다고 무작정 남에게 의존하지 않았다. 대학 4년, 신대원 3년, 그렇게 7년 동안 장학금을 받으면서 다닐 수 있었다. 학교에선 전화근로까지 신청해 정말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수업 중에 아픔이 찾아오면 진통제 먹어가면서 공부했어요. 힘들었지요. 하지만 고통보다 기쁨이 더 컸답니다. 정말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살았지요. 하나님은 작은 것도 잊지 않으시고 이루어주셨어요. 소망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께서는 기대감을 갖게 하셨어요. 내가 이룰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 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주은미사모 옆에 많은 동역자를 세워주셨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장학금을 받기도 했고, 가깝게는 대학시절 내내 옆에서 손발이 돼주었던 남동생과 가족들. 남편 역시 함께 공부하며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았던 대학 동기.“제가 걸어온 길이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많은 도움으로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죠. 언젠가는 제가 받은 것처럼 똑같이 다른 누군가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대학원을 휴학하고 일산의 장애인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인쇄매체 편집기술을 배우며, 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고민했다.

“전 한 번도 장애인으로서 생활해 본적이 없었어요. 생활하는데 조금 불편은 있었지만,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공부할 수 있고, 일할 수 있었죠.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어려움을 더 잘 알게 됐어요.”

휴학했던 대학원 사회사업학과를 마치고 장애인사역을 하는 밀알선교단에서 편집기자로 활동했다. 그 누구보다 장애인들의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있었기에 때로는 엄한 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다정한 언니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기위해 한 발 더 세상 앞에 나왔다.

희망교육연대. 10개월 전 주은미사모가 새로이 둥지를 튼 이곳은 희망을 줄 수 있는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활동하는 곳. 그는 이곳에서 자신이 가진 능력을 십분 발휘해 자폐아동들의 특수교육을 보조하고, 정책적인 부분까지 정부에 제안해 이를 반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저는 누구보다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았고, 그만큼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현재 장애아동들은 중학교조차 의무교육이 되지 않습니다. 그 부모들은 비싼 교육비의 부담까지 안아야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지요. 장애와 교육 내 빈부격차를 없앨 뿐만 아니라 작은 생활의 벽까지 없어지도록 그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돕고 있어요.”  

주중에는 장애아동들의 인권과 교육을 위해 고민하고, 주말에는 가족들과 함께 장애아동들을 위한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집에서는 두 아이들의 엄마로, 부목사로 목회를 하고 있는 남편의 내조로 바쁘지만, 그는 요즘 교회 차원의 수화교실 운영을 제안하느라 바쁘다.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교회가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을 돕고 전도까지 할 수 있는 1석 2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무조건 도와줘야한다는 생각보다는 교육을 통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자립할 수 있는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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