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도전하고 아낌없이 나눈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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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도전하고 아낌없이 나눈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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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4.0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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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사막에서 농사 성공한 영동농장 김용복 회장

사우디아라비아 사막에서 배추와 무, 고추를 심어 부농(富農)을 이룬 영동농장 김용복회장(용복장학회 설립자, 벧엘교회).

전남 강진군에 230만㎡의 광활한 농지를 소유한 대한민국 최고의 농사꾼이 되기까지의 김용복 회장은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오직 은혜”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가난한 농부의 5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늙은 홀아버지의 말라  비틀어진 젖꼭지를 빨고 만지며 유소년기를 보내야 했던 김 회장은 너무나 가난했던 탓에 월사금을 못내 중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책가방 하나 달랑 메고 울면서 고향을 떠나 객지인 부산으로 떠난 열다섯살의 김용복은 고향하늘을 뒤돌아 보며 다짐했다.


“기어코 성공해서 돌아오리라. 돈을 많이 벌어 우리 고향에서 제일 땅이 많은 부자가 되어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리라. 그리고 나처럼 공부 잘하고 착한데도 가난 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못하는 불쌍한 학생들을 도와 실컷 공부하도록 학비를 대주어 나라를 위해 큰 일 하는 참된 일꾼으로 키우는 사람이 되리라.”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배고프고 외로운 인내의 날들을 수없이 보내야 했다. 오직 영어사전과 씨름하면서 성공을 위해 열심히 힘을 길렀다.

얼마 후 미군부대의 하우스보이로 취직이 되어 성실함을 인정받아 부대장의 당번이 될 수 있었고 운전까지 배울 수 있었다. 이 시절 배운 영어와 운전 실력으로 19세의 나이에 광주 상무대 군사고문단 수송부의 통역관이 되었다.


그 후 다시 서울에 올라와 미군부대에 취직을 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27세의 나이로 건국대학교 정외과 야간학부에 영감소리를 들으며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경야독으로 인한 과로로 폐결핵을 얻었으며, 직장과 학업을 동시에 잃을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러나 옆에서 헌신적으로 돕는 아내의 노력으로 학업만은 계속할 수 있었다. 결핵이 완쾌된 후 다시 미군부대에 직장을 얻었으며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미8군 사령부내 주한 메릴랜드 주립대학 서울분교의 교무과장이라는 직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월남전이 발발했을 때 미 빈넬회사에 월급 357달러의 보급행정 기능공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그는 부역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출국이 불가능했지만 대학 은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출국할 수 있었고,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끝내는 주월 한국인협의회장이라는 직위에까지 오르면서 상당한 재산가가 되어 이를 바탕으로 서울에 나와 국제 PP밴드라는 작은 공장의 사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연탄가스 사고로 5명의 직원이 쓰러졌고 그 중 2명이 사망하면서 다시 좌절의 늪으로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성남에서 150원짜리 설렁탕 장사를 하며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 사우디아라비아에 375달러의 미국회사 기능공 신분으로 다시 취업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단돈 7달러를 손에 쥐고 “10년 안에 성공하지 못하면 비록 시체로 돌아올망정 결코 이 나라에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몇 번이고 되새기면서 사우디에 꿈을 나래를 펼쳤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생활하면서 당시 중동 개발로 인해 엄청난 숫자의 한인 근로자들이 일하는 모습과 신선하고 맛있는 김치를 원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 해답은 김치다. 사우디 사막에 배추와 무 고추를 심어 성공하면 큰 돈을 벌 수 있겠다”

이 같은 그의 돈키호테적인 발상은 자본금이 없는 그에게는 하나의 바램과 꿈 뿐이었다. 끈질긴 노력으로 땅을 빌려주겠다는 사람과 자본금을 빌려주겠다는 사람이 생겼지만 함께 와서 일할 농부가 없었던 것이다.


1978년 사우디 사막에 푸른 초원을 가꾸겠다는 신념으로 삽 네 자루를 가지고 농장을 시작했다. 직원들의 좌절, 배신 그리고 무더위 등 수많은 난관들이 그를 약하게 만들었지만 피눈물 나는 고생 끝에 드디어 1797년 4월 배추 500㎏, 시가 2,500리얄(한화 약 50만원 상당)의 첫 수확을 맛볼 수 있었다.

그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사우디에서 사업을 새롭게 시작하게 될 무렵이었다. 부하직원의 배신으로 사업에 실패해 몇 차례의 자살을 시도하며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그를 보면서 아내는 교회에 갈 것을 애원했으며, 그는 마지못해 교회에 따라갔다.

“처음 교회에 갔는데 벧엘교회 박상덕 목사님께서 안수기도를 해 주시는 거예요. 순간, 서러운 마음이 한꺼번에 폭발하며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이 평안해 짐을 느꼈습니다. 말로만 듣던 성령님께서 제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한참을 울고 나니 바로 앞에 성경이 펼쳐져 있었다. 시편 126편 5-6절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하던 사우디에서 피와 눈물의 첫 수확을 거둔 김 회장은 모든 직원들과 함께 얼마나 울었던지, 그 때의 기쁨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회상하고 있다.


기적의 농장이 성공하게 되자 한국의 건설회사들이 김 회장의 소식을 듣고는 돈을 싸들고 농장을 찾아온 것이다. 이후 많은 돈을 벌어 왕족들이나 타는 벤츠500을 타고 다니며 사우디 전역을 휩쓸었다.


이런 공로로 녹색혁명의 기수라는 거창한 칭호와 함께 1982년 기능공의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정부로부터 석탑산업훈장을 받았으며, 1980년 이후 한동안 개인 외화보유 랭킹 1인자의 위치까지 올랐다.


마침내 큰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사우디에서 번 돈으로 우리나라에 버림받은 땅 100만평을 구입, 농경지를 조성해 드디어 꿈에 그리던 만석꾼이 되었다.

또 하나의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 1989년 사재 10억원을 들여 (재)용복장학회를 만들었다.  당시 서울여상에 다니던 김화자를 1호로 지금까지 111명이 혜택을 받았으며, 대학은 물론 유학까지 시켜 존경받는 젊은 현직판사, 대학교수, 의학박사 등의 인재를 배출했다.


60세부터를 인생의 3단계로 생각해 사회에 환원하는 기간으로 설정한 김용복회장의 이같은 삶은 100억원을 출연해 한사랑농촌문화재단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돈은 어떻게 버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돈이란 벌 때보다 남을 위해 보람되게 쓸 때 행복을 가져다주는 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 자서전 `끝없이 도전하고 아낌없이 나눠라`(제네시스21)를 출간

가난과 처절한 삶으로 출발했던 그가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이제 행복한 노후를 살고 있는 그는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자서전 ‘끝없이 도전하고 아낌없이 나눠라’(제네시스21)를 출간했다.

지난 2월 말 그의 모교인 건국대학교에서 재단 관계자들과 지인들을 초청해 출판기념회를 가진 그는 이 책을 전국 200여 교회 목회자에게 선물로 보내주었고, 인세는 모두 장학금으로 사용할 계획이다.


정직과 성실, 여기에다 신앙으로 오늘의 성공을 이룬 김용복회장은 내년 4월 20일 일선에서 물러나는 은퇴식을 가지기로 했다. 이날은 결혼 50주년이고 영동농장 창립 30주년이다. 그리고 1979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배추 500㎏을 첫 수확한 날이기도 하다.

역대상에 나오는 야베스의 기도와 잠언 11장 말씀은 김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말씀 중 하나이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잠 11:24-25)

<이석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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