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으로 사는 인생, 평생 하나님 일 하며 살아야지요”
상태바
“덤으로 사는 인생, 평생 하나님 일 하며 살아야지요”
  • 현승미
  • 승인 2008.02.13 17: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남기독신문 대표 강 학 구 집사

단발머리, 물 빠진 청바지. 마흔 줄의 나이에 쉽게 소화할 수 없는 범상치 않은 모습. 첫 눈에 예술가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강학구집사.


그는 교회 오케스트라단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실제 이력은 그 이상으로 화려하다. 파프리카를 재배하는 사업가, 경남기독신문 사장 등 그 어느 것 하나 그가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복을 엄청 받았어요.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한번 예수님께 붙잡히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매 순간 제가 유혹의 길로 빠지지 않도록 붙잡아주시고, 끌어주시니까 딴 길로 갈 수가 없어요.”


사실 그는 40년 동안 교회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그 흔한 성경학교조차 가볼 기회가 없었다. 13년 전 원예농사를 하기 위한 유리 온실을 짓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선진국의 시설을 둘러보기 위해 관련 건축가들과 유럽여행길에 나서게 됐는데 그 곳에서 인상적인 만남을 갖게 됐다.


#유럽여행길에 만난 하나님


“벨기에라는 나라가 세워질 때 교회가 제일 먼저 세워졌다면서요. 그 나라를 방문했다가 주일마다 가족들이 다 한 자리에 모이는 모습을 보면서 호감을 갖게 됐지요. 당시 일행 중 충현교회 장로님도 계셨는데, 그 분의 전도도 한 몫을 했습니다.”

당장 교회에 나가진 못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께로 향해 있었다. 유리온실이 지어지고 첫 기공식 때 1차적으로 감사예배를 드린 것이다.


“당시 4명의 동료들과 함께 유리온실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 중 1명이 크리스천, 나머지 2명이 불교였지요. 크리스천 동료의 제안을 대표인 제가 받아들여 돼지머리를 치우고 예배를 드렸지요.”


이미 젊은 시절 지역에서 이름을 알렸던 강집사. 당시 유리온실 1ha를 짓는다는 것도 쉬운 작업은 아니었기에 기공식에는 그 지역 고위공무원에서부터 동네유지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목사님 주재 하에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주일성수는 크리스천이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할 첫 번째 덕목. 그때문이었을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연단을 내리셨다.


“36살 때 동료 중 1명이 죽었는데, 이상하게 그때부터 머리가 너무 아팠어요. 무당도 불러 굿도 해보고, 병원에 가서 CT촬영, MRI촬영 다 해봤는데, 병명조차 알 수 없었죠. 뭘 해도 소용없었던 상황에서 목사님께 기도를 받게 됐어요. 그리고는 언제부턴가 머리 아픈 게 깨끗이 나았어요.”


결국 1997년도부터 교회에 처음 나가기 시작했다. 교인이 30명 남짓 되는 개척교회. 전도를 위해 결성한 오케스트라에서 섹소폰을 맡았다. 그러다 오케스트라의 꽃이라 불리는 팀파니의 매력에 빠져 팀파니를 배우게 됐다.


#예수님께 끌려다닌 삶


“당시 마산, 진주, 창원, 진해를 통틀어 팀파니를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2명밖에 없을 정도로 귀한 위치였어요. 처음엔 그 매력에 빠져 배우게 됐는데, 나중에는 제가 게을러지지 않도록, 악의 길로 빠지지 않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게 됐어요.”

팀파니가 빠지면 오케스트라가 제대로 완성될 수 없다. 교회 내에서 팀파니를 연주할 수 있는 이도 오직 강집사뿐이었다. 때문에 그에게는 잠깐의 외도나 게으름이 용납되지 않았던 것. 그는 이를 두고 엄청난 복을 받았다고 말한다.


2000년 1월 집사 이후 4년 만에 안수집사가 됐다. 2006년 말 오케스트라 단장으로 임명됐고, 지금은 성가대장으로 섬기고 있다.


“사실 제 달란트는 사업이에요. 12년 전 예수 안 믿을 때 원예 장미인의 최고가 됐었지요. 그때 당시 청와대에 초청돼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어요. 그때 이미 앞에 나서서 일하는 게 부질없다는 것을 경험했죠.”


처음 장미원예로 시작한 그는 장미 한 단에 1만원 할 무렵 2만 2천 평의 유리온실을 지었다. 96년에 건축이 완성됐고, 97년 첫 수확하려는 찰나 장미가격이 급락했고, 망할 위기에 처했다. 그때 마침 파프리카를 알게 됐고 지금은 연간 350만 불을 해외에 수출하는 성공을 거뒀다.


4명이 시작한 파프리카사업이 지금은 13명~14명이 함께 하게 됐다. 사업이 확장될수록 욕심이 생길만도 한데, 처음 5년간 대표이사를 맡았던 강집사는 현재 총무이사로 직책을 낮춰 섬기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 3월 18일 파프리카와는 전혀 다른 업종인 기독신문을 창간했다.


“처음에는 교회를 이어주는, 교회를 통해 아는 사람, 믿는 사람을 위하는 생활정보지로 준비했어요. 그런데 마음만큼 잘 안 돼더라고요. 그때 울산 기독신문 하시는 분이 신문을 하라고 조언을 해 주셨지요.”


그러나 단순한 신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알리고 문서선교지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하는 일이었기에 선뜻 결심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하게 됐다. 신문을 만들만큼 목회자를 많이 만났던가, 신문을 만들 수 있는 신앙이 받침이 돼 있나 많은 고민을 하게 됐다. 마침내 내린 결정은 이사진 구성이었다.

“3개월 동안 기도 후 말과 행동을 같이 하는 분이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소개받은 분이 지금의 이사장 이종승목사(창원 임마누엘교회)님입니다. 당시 신문을 만든다니까 주변에서 많은 청탁이 있었지요. 하지만, 모두 뿌리치고 무조건 목사님이 제일 잘 맞는 이들하고 이사진을 구성하라며 전적으로 믿고 맡겼지요.”


#신문창간으로 은혜 받아


그리고 10월 25일 ‘경남기독신문 창간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신문은 제게 생소한 분야잖아요. 그저 하나님 일 한다는 생각에 시작했는데, 오히려 제가 많은 은혜를 받았어요. 시골에서 몇 십년동안 목회하신 목사님들은 방송이나 언론에 한 번 나오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런 분들이 신문에 글이 나가고, 교회 이야기가 소개되고 하니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세요. 그게 또 제가 감동이 되는 거죠. 제가 예수님 믿어서 이런 기쁨을 알게 된 거지요.”


지역 기독교연합회 모임에서도 20명 모이던 이들이 신문이 가자 50명 모이고, 150명 모이던 이들이 250명 모이는 등 많은 변화와 감동을 경험했다.


파프리카 사업으로 1년에 2억~3억씩 번 돈이 신문 만드는데 다 들어갈 정도로 열약한 상황이지만 그는 신문을 통한 또 다른 비전을 키우고 있다.


“일반성도로 만 명의 구독자를 만드는게 올해 제 목표입니다. 아마 전국 어디에도 그런 신문은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 목회자들이나 교역자들이 신문을 구독하는 경우가 많지요.”


2008년 100여개의 교회가 후원을 자청한 상태. 일반성도로 이루어진 만 명의 구독자를 조성한다면 교회에서 들어오는 후원금은 고스란히 개척교회와 미자립교회를 위해 다시 후원을 할 계획이다.


뿐만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건강한 먹거리를 지속적으로 살리고 키워내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일할 수 있게 일자리를 조성하는 것도 그가 가진 비전이다.


“지금 비닐온실을 유리온실처럼 짓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 중 3천 평 정도 정부에서 산업단지로 지정될 것 같아요. 그럼 만 평 정도 건강 위한 먹거리 시설을 지어서 정부 보조하에 일거리를 조성하는 거죠. 열심히 믿는 이들 중 300~400명 정도는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용창출의 의미를 두고, 사람들을 통해 또 나에게 복이 돌아오는거죠.”


2년 전 10월의 마지막 날 큰 전기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 은혜 가운데 살 수 있었다며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고백하는 강학구집사. 그는 평생 즐겁게 새 일 하다 하나님 곁으로 가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