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김응조 목사를 추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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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김응조 목사를 추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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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1.02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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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인목사<평화교회>


안양의 성결대학교는 수리산을 배경으로 앉아 있어서 이 즈음이 멋진 단풍동산으로 변한다. 해발 500미터의 작은 산이지만 산봉우리가 뽀쭉한 모습이 여간 단단해 보이지 않는다.


단풍이라야 설악산이나 오대산, 내장산등 명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산 속으로 들어갈수록 아기자기한 나무들 사이로 붉은 빛 노란 빛이 아스라이 비치는 겸손한 가을산이다.


오늘도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산 정상을 뛰어 올라갈 수 있는 다정한 산이다. 이 산 아래의 선지동산에서 나는 30년 전 신학공부를 시작했고, 좋은 스승들과 학우들을 많이 만났다.


몇 해 전 우리 교회에서 부교역자를 청빙하게 되어 몇 사람과 면담을 가졌다. 그들에게 나는 여전한 질문을 던진다. ‘가장 존경하는 목사님이 누구요?’ 목회 중에 존경하는 분을 만나야 하고 존경하는 분이 누군가 보면 그의 성향을 대강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다들 쉽게 대답하는데 그날 내 앞에 앉은 후보자는 ‘없습니다’고 담담하게 대답한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몇 사람 이름을 열거하는데도 그는 아니라고 한다.


그와의 답답한 면담을 마치고 뒤로 돌아앉아 나는 ‘존경하는 목사님이 누군가?’라고 자문했다. 얼른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김응조 목사님이시다. 왜 그런가?


숱한 어려움을 겪고 승리한 분이시기에 존경할 만 하다. 이분은 고난도 겪었고, 고학을 했으며, 일제하 독립운동으로 2년여 옥고를 경함한 분이시다. 전쟁을 거쳤고, 교회를 수없이 개척했으며, 어려운 교회를 담임하여 부흥시켰다. 교단 분열을 경험했고 사랑하는 분들이 등을 돌리는 아픔도 감수했다. 신학교를 일으켜 현재와 같은 기독교 명문사학으로 발전시킨 분이시다. 현대 목회자들은 영광은 받으려 하나 김응조 목사님과 같이 고난을 몸으로 자청하는 이들은 적다.


다양한 은사로 하나님이 사용하신 분이다. 그는 교회 개척자였고, 행정가였으며, 신학교 운영도 탁월했다.


오죽했으면 선교사나 외부 지원 없이 성결대학교를 그만큼 키울 수 있었을까? 그는 부흥사였고, 신유은사를 직접 체험한 분으로 실제로 많은 병자들을 고친 분이었다. 신학자였으며 특히 탁월한 성경주해가 이시기도 했다. 이만한 은사를 가진 분을 현대에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을까?


나는 제주도에서 군목으로 사역할 때 제주시의 기장 서부교회를 찾아가 인사를 드린 적이 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대뜸 [김응조목사 성서강해]를 어디서 구할 수 없느냐고 내게 물었다. 교단을 초월해 김 목사님의 성서강해는 유명한 성경지침서가 된다. 목사는 ‘성경전문가’ 여야 한다는 김응조 목사님의 가르침은 지금도 합당하다.


그 바쁜 중에도 기도의 인물이었고, 모세처럼 기도로 응답받아 산 인물이었기에 존경한다. 하는 일 없이 바쁜 척하는 내게는 기도가 가장 소중하지만 기도의 시간이 실제로 짧다. 그러므로 오늘도 부끄럽게 고백한다. ‘목사님을 닮아 기도의 목회자가 되었으면’ 언젠가 겨울날 자택으로 찾아뵈었을 때 내게 권한 방석이 기도의 흔적으로 닳아있었다. 그날 나도 평생 10개쯤 방석을 닳아 없앴으면 하고 작정했었다.


그 귀한 목사님이 91년에 돌아가셨고, 그 후학들이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교단을 초월해 목회에 승리하고 있다.


11월 15일에는 그분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고, 성결대학교의 총장이 된 정상운 목사가 주축이 되어 30년 입학동기, 졸업동기들을 모아 잔치를 한단다. 아마도 이 날 모여서는 가장 존경하는 은사가 누구였는가 질문한다면 영암 김응조 목사님이었노라고 서슴없이 대답할게다. 그리고 다들 제일 많이 사랑받았노라고 자랑들을 앞세워 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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