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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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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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0.1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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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목사<의왕중앙교회>


사람들은 뭐든지 받으면 즐거워하며 좋아한다. 그래서 받는데 열중한다. 누구는 받았는데 나는 받지 못하면 속상해 하고 힘들어 한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역리적인 교훈을 성경 곳곳에서 하신다. 모든 말씀이 세상의 이치와 대립되기도 하나 세상의 것을 압도한다.


주께서 사랑에 관한 정의와 관계를 한 꾸미에 꿰어 교훈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르시기를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하셨다.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사랑에 대하여 그릇되게 생각하는 바의 첫째가 사랑을 주는 것으로 알지 못하고 받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사랑을 받으려고 사랑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날 사랑하느냐고 묻고 확인한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준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이 질문의 답은 단순해 보이지만 실상은 대단이 복잡하다. “준다”는 것에 대한 가장 큰 오해가 준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이라는 오해다. 사람들은 받는 것이 사랑이다. 받는 것에 대한 기대와 이해(利害)를 사랑이라고 지레 결론한다. 사랑은 마음을 주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을 우리는 마음을 빼앗겼다고 표현한다.


사람들 중에 상업형(商業型) 성격의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준다는 것을 받는 것과 이익의 산출로 보거나 교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받는 것 없이 주는 것은 사기 당하는 것이 거나 손해 보는 것이 된다. give and take가 사랑의 기본형이다. 저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도 사랑할 수 가 없다고 강변한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아니’라고 강력한 반대를 표한다. 나를 먼저 열고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한다. 성경의 주문이다.


성격상 비생산적인 사람들에게는 주는 것을 가난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려들지 않는다. 주는 것만큼 내 것이 없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움켜쥐거나 어쩔 수 없이 줄지라도 주면서도 상처를 입는다. 무엇이든지 내손에 있어야 하고, 가져야 한다. 어떤 것이든지, 어떤 형태로든지 나를 떠나거나 멀어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상처고, 손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분노하고 원수를 맺는다. 진정 돌이켜 보라. 무엇이 손해되었는가. 누가 손해를 입혔는가!  하지만 설명 불능한 패배와 손해의식에 사로잡힌다.


생산적인 사람은 주는 것에 대한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주는 것이 또 다른 생산으로 여긴다. 주는 것이야말로 잠재적인 능력의 최고의 표현이다. 맑고 생명력이 있는 샘은 물이 둑을 넘어 흘러야 한다. 흐르지 않는 샘은 썩는다. 흘러 들어오는 곳이 없어도 물이 흘러야 하고 물 긷는 이들이 길어 올려 사용해야 살아 있는 샘이 된다.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물이 솟아오른다. 물이 흐른다는 것은 살아있음이며, 이는 곧 주는 것의 결과다. 주는 행위에서 생겨나는 힘, 부(富), 생명력, 잠재력의 무한함을 경험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큰 기쁨과 비전의 강렬함을 느끼고, 소유하고, 누리게 된다. 그래서 주는 것, 베푸는 것이 받는 것보다 훨씬 즐겁다.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교훈이시다.


사랑은 주는 행위이다. 사랑은 내가 가진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사랑은 생명을 준다. 주께서 생명을 주셨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생명을 받은 나에게는 예수님이 최고의 절대사랑이시다. 예수님이 죽어서 생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 나셔서 생명이 되어 주셨다. 그러기에 사랑은 주는 것이라는 이 말을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말로 단정하여 오해해서는 안된다.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줌으로 성립되고 완성되는 사랑으로써 자신이 행복하게 되고 풍요로워지고 기쁨을 누리고 평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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