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특집 - 루터에서 한국교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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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특집 - 루터에서 한국교회까지
  • 승인 2001.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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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안에 타오르는 개혁열정을…”

1517년 테첼이라고 불리우는 도미니칸 수도승이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독일에 들어왔다. 면죄부는 성 베드로성당의 수축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교황 레오10세가 발급한 것으로, 종교개혁의 발단이 됐다. 당시 루터는 비텐베르그대학에서 강의를 맡은 상태로 새로운 신학을 연구하던 시기였다.

‘돈 주머니에 동전이 찰랑하며 소리를 내는 순간 헌금한 사람의 죄가 모두 용서된다’는 것이 테첼의 유혹이었다. 저렴한 가격으로 면죄부 판매를 선전한 탓에 많은 사람들이 비텐베르그에 몰려들었다. 루터는 무지한 사람을 속이는 기만에 놀라며 종교개혁의 발단을 일으킨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했다. 때는 1517년 10월31일. 매년 10월 마지막 주간을 종교개혁 주간으로 지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중세가톨릭 신학의 허구를 비난한 루터의 반박문은, 루터 개인을 넘어 전국적인 국민운동과 사회운동으로 확대됐다. 1521년 루터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재세례파운동’이 나타나 기존의 법 대신 각자 개인이 갖고있는 양심이 도덕과 법의 원천이라고 주장, 사유재산 부정·공동분배 이론을 들고 나왔다.

퀘이커교도·침례교·메노파 등이 이에 관련을 가진 교파들이다. 또 토마스 뮌처를 중심으로 나타난 농민반란도 결국 루터의 영향 아래 있었지만 루터는 과격·체제전복이라는 이슈에는 동참하지 않았다.

독일의 개혁운동이 시작되자 마자 스위스의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이 전개됐다. 1519년에 전개된 츠빙글리 개혁은, 루터보다 더 철저하게 성경주의를 내걸고 성체성사(聖體聖事)를 부정했다. 하지만 그는 1531년 그의 개혁에 반대하는 가톨릭세력과 삼림지대에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츠빙글리의 뒤를 이어 종교개혁을 성공시킨 인물은 칼빈. 프랑스 중산층 출신으로 법률을 공부하다가 개혁사상에 접한 그는, 스위스 바젤에서 츠빙글리 사상을 연구하던 중 그 유명한 ‘기독교강요’(1536년)를 집필한다. 그는 스위스 바젤에서 소위 신정정치를 실시, 축제와 오락적인 모임을 금지하고 극장도 폐쇄하는 등 시민들에게 매우 엄격한 금욕생활을 강요했다.

이같은 칼빈의 노력에 지지를 보여 유럽 각지에서 지지자들이 몰려 칼빈주의로 자리잡았다. 프랑스의 위그노, 네덜란드의 고이센, 스코틀란드의 장로파, 영국의 퓨리탄 등은 모두 칼빈파에 속한다. 하버드대학의 교회사 담당인 윌리암스박사는 루터·츠빙글리·칼비 등을 ‘행정적 관료적 개혁’이라고 했으며 재침례파·신령파·복음주의적 합리론자 등을 ‘급진적 개혁’이라고 불렀다.

여하튼 종교개혁의 결과로 루터를 중심으로한 독일의 개혁운동은 ‘루터파’로, 스위스의 츠빙글리와 칼빈의 개혁운동은 ‘개혁파’로 발전, 후일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회’로 명명됐다. 후일 장로교회 후예들이 미국, 카나다, 호주, 뉴질랜드로 이주하고 이어 우리나라에 이들이 선교사로 내한, 한국장로교회를 형성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정신과 연장선상에 있다는 얘기다. ‘건실한 교리·순결한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시대 요청인 것이다.

윤영호기자(yyho@ucn.co.kr) 중세교회 부패 ‘세 가지’본질

면죄부는 원래 돈을 받고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자선, 단식, 십자군에 참여할 경우 발행됐다. 하지만 사치스런 생활로 많은 돈이 필요했던 르네상스교황들이 이를 판매했던 것이다. 수입원을 만든 셈이다.

종교개혁과 관련, 고신대학교 이상규박사는 중세교회의 부패를 세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하나는 교리와 신학의 변질 그리고 부에 대한 지나친 탐욕 마지막으로 교회의 권력추구가 그것들이다.

인간중심의 신학사상과 공로사상으로 거짓경건이 난무했다는 것이며, 교회 안에 세속가치관이 들어와 사회를 객관적으로 성찰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 이박사의 지적이다. 또 권력을 추구함으로써 교회가 세상의 질서를 그대로 모방해 교황은 세상의 왕 노릇도 겸할 수 있었다.

비텐베르그성당 입구에 게시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근본적으로 이같은 가톨릭교회의 본질을 파헤치는 냉철함이 있었다. 이상규박사는 “만약 한국교회가 부패했다면 그것은 교회구조보다 교회자도자들의 부패”라고 지적하며 ‘성직자의 삶은 평신도의 복음’이라는 중세경구에 주목하길 강조했다.

꼭 성공해야 했던 개혁

종교개혁이 일어난 당시는, 사회·경제적으로 중세를 탈피하려는 현상들이 줄을 잇고 있다. 가장 눈에 띠는 것이 신항로개척.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 서인도제도가 발견되고 대서양을 횡단하는 한편 1498년에는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항로를 개척함으로써 포르투갈이 동방무역을 독점하도록 기여한다. 이어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1519년에는 마젤란이 지구를 한바퀴도는데 성공, 코페니르쿠스적 사고전환을 증명한다.

신항로개척으로 에스파니아는 아메리카로 진출, 마야·아즈텍·잉카문명을 멸망시키고 원주민을 동원해 금·은광을 개발하고 사탕수수등 대농장을 운영하게 된다.

이 시기 유럽은 신항로개척으로 상업혁명이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 값싼 노동력으로 많은 상품을 생산함으로써 근대기업 태동의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금·은이 유럽에 다량 유입됐다는 것은 달리말해서 중세시대의 근간을 이루던 지주·영주의 삶을 어렵게 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상인들은 이 시기 새로운 계급을 형성, 시민계층을 만들어 지주층과 대립양상을 띠게 된다.

결국 중세시대의 종말현상이 나타난 시기이다. 14세기에 발흥한 르네상스의 여파가 신항로개척과 상업혁명에 영향을 주고 마지막단계에서 종교의 각성을 촉구, 혁명적 개혁에 밑거름이 된 것인데 종교개혁 당시 루터를 지지하던 계층은 대부분 시민계층이었고 반대하던 부류는 당시 대토지를 소유한 중세교회 및 영주였던 것은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객관요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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