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심의 세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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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의 세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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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6.08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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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인목사<예장통합 기획국장>


1990년대 이후 세계화는 우리 사회 전체의 화두가 되었다. 세계화의 물결은 그것이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 모두의 삶에 들어와 있다. 이렇게 전 세계적인 물결에 대한 해석과 이해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각자가 처한 삶의 자리에 따라 세계화를 느끼는 감각이 다르고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얻어지는 득과 실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이다. 


한비야씨의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이라는 세계일주 여행기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해외 어학연수다, 조기 유학이다, 또는 그저 떠나고 싶다는 말로 해외여행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세계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FTA라든지, 경제 세계화에 따른 이주 노동자의 증가라든지, 등등의 사회적, 경제적인 현상들을 세계화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경제학에서 조차도 세계화에 대한 의견들은 큰 편차를 보인다. 세계화가 옳다, 그르다를 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세계화라는 것은 아주 단순히 우리의 시각과 삶의 터전을 세계로 넓히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고 싶다.


6월은 애국 보훈의 달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잃으신 순국선열들을 기리는 현충일이 이달 초인 6일에 자리 잡고 있다. 에큐메니칼 사역과 교단의 해외 파트너십 사역으로 여행을 많이 하는 편인 본인은 각 나라들의 기념비적인 장소나 건물들이 이렇게 각각의 나라들을 위하여 영웅적인 희생을 했던 분들을 기리는 것임을 발견하곤 한다. 참가했던 전쟁이나 전투, 때와 장소가 다를 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런데 과연 그들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위한, 혹은 누구의 평화(평안)를 위한 죽음이었을까 하는 질문이 생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한다는 일이 편협한 자기애에 빠질 때 후대의 역사는 그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당시에는 지대한 애국심의 발로로, 목숨을 바쳐 지켜낸 전쟁이었겠지만 과연 모든 희생이 각각 정당화 되어야 옳은 것인가 하는 물음표로 끝나는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는 한국 경제지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매일매일 살아간다. 한국교회는 개 교회와 개 교단의 양적인 성장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한다. 과연 우리들의 관심과 기도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합당한 기도요 관심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우리의 사랑이 세계화에 걸맞은 것이 되기를 바란다.


나의 이익을 위하여 상대편을 헐뜯거나 폄하 하는 것이 아니고, 소수의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다수의 무고한 사람들의 행복을 깨뜨리는 것이 아닌 그런 사랑이기를 바란다.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사람들을 어떤 형태로든지 절대로 이용하거나 짓밟지 말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진리가 우리들의 애국심에 바탕이 되기를 바란다. 21세기의 세계화된 지구에서 더 이상 외통수의 애국심은 통하지 않는다. 획일화된 애국심도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애국심을 세계화함으로써 전 세계의 평화와 생명을 살리는 보다 폭넓은 사랑으로 새로운 ‘세계화’의 역사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번 6월에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며 함께 기억할 말씀은 요한복음 8장 32절일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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