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하나님의 현현과 성육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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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하나님의 현현과 성육신
  • 윤영호
  • 승인 2007.01.05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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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이루신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   

2006 성탄절을 통해 우리는 또 한 번의 그리스도를 경험했다. 구원주로서 오셨지만 가장 약한 존재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역사적으로 많은 오해들이 있어왔다. 심지어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해석한 일본의 신학자 전천건삼(田千建三)은 그의 유명한 저서 ‘예수라는 사나이’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예수를 두 번 죽였다. 한번은 십자가에서 또 한번은 그를 종교적 교주로 추앙하는 것으로 그러하다.” 실로 충격적인 해석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람 역시 적지 않다. 유대인과 로마에 의해 살해당한 예수를 인류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종교적 교주로서 추앙함으로써 두 번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탄생을 바라보는 관점은 따라서 매우 중요하다. 거짓된 가르침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현현으로 바라보는 예수탄생(=성육신)의  비밀은 구약과 깊은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구약의 ‘하나님 현현’과 ‘예수님 탄생’그리고 ‘완전한 성전재건’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대사역을 알아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의 죄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사람들이 지은 죄를 하나님이 대신하여 해결한 사건이다. 인간의 죄와 관련한 특성은 두 가지로 설명된다. 죄에 대한 ‘심판’과 ‘용서’가 그것이다. 죄지은 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만약 죄를 짓고도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율법은 있으나 마나한 것이 된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도 무가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심판만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긍휼은 무기력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죄는 반드시 용서받아야할 특성을 지닌다. 하나님이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서는 죄값을 치르는데서 만 가능하다.

이 두가지 특성을 충족하는 유일의 방법은 심판과 용서를 동시에 하는 것이다. 공의를 세우고 자비(사랑)를 베푸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심판과 용서의 상징 ‘아사셀’

죄의 문제는, 하지만 죄를 지은 인간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구약에서도 흠없는 어린양을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아사셀’이란 이름을 가진 어린양을 주목해야 한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죄를 적은 목록을 아사셀의 몸에 달아 멀리 떠나보냈다. 자신의 죄를 매달고 가는 아사셀은 욕을 먹으며 때때로 털을 쥐어뜯기기도 하고 비참한 상태로 멀리 내어 쫓기고 말았다.


필시 아사셀은 광야 어디에선가 죽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사셀과 번제 양을 통해 자신의 죄 문제를 반복적으로 절기를 맞아 해결 하곤 했다. 여기서 우리는 ‘죄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죄 지은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 문제를 해결하도록 보냄받은 분이다. 그는 ‘죄 없는’ 완전한 분이므로 죄를 대신 해결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셨고, 그 분 자체가 하나님이셨으므로 용서도 가능했다. 심판과 용서를 동시에 수행하기에 매우 적합하신 분이셨다.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심판과 용서라는 두개의 균형축을 통해 하나님의 대속(성육신)을 설명한 사람은 고대 철학자인 ‘어거스틴’이다. 그의 주장은 15세기를 지난 현재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원후 4~5세기 경에는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 성령, 인간, 죄 등을 다룬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21세기를 맞은 현재에도 이같은 노력들은 교회성장과 영성부흥이란 새로운 틀을 만들며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B.C 4세기 어거스틴의 통찰력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죄 때문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결단임에 분명하다. 현대 신학계는 하지만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바울이 제시한대로 ‘하나님의 현현(顯現)’이란 개념으로 성육신을 설명하며 결국 ‘성전(聖殿)=성도의 몸’이란 개념을 이끌어 내고 있다.


영국의 복음주의 목회자로 현재는 미국 일리노이주 알링톤하이츠 복음주의자유교회를 담임하는 ‘콜린 스미스목사’는 이같은 개념을 잘 정리하여 교육하는 대표주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들의 주장은 구약시대 현현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광야의 성막건축과 솔로몬의 성전건축을 통해 역사적으로 이어졌음을 기술하면서 결국 예수님의 탄생으로 절정에 닿았고, 마침내 오순절의 성령체험을 지나면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 자체가 거룩한 성전으로 변화됐다고 한다. 기독교인들의 몸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로 본질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죄의 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이 다시 만나 대화합과 연합을 이루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현현하신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나타나셨다. 타지 않는 떨기나무의 신비스런 광경은 광야생활로 나아갔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여졌다. 모세는 자욱한 연기와 어두운 구름을 동반한 색다른 현상을 두려워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라고 신중하게 설명하곤 했다.

이후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임재하시기로 작정하셨다. 특별히 두 그룹이 마주보도록 제작된 언약궤는 ‘시은소’(언약궤 위의 두그룹이 마주보는 곳)에서의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보증했다.


솔로몬 성전 후 없어진 하나님 임재

솔로몬왕이 기원전 10세기 성전을 완공했을 때 하나님은 광야의 그 때와 마찬가지로 어두운 구름과 연기를 동반하며 임재했다. 광야 성막에서 임재 이후 무려 400년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임재의 증표를 보여주시지 않다가 성전낙성식 때 보여주셨다.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백성들은 솔로몬의 설명을 듣고야 임재하심을 알게 됐을 정도였다.


성경은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페르시아(바사제국)가 바벨론을 물리치고 패권을 갖게 된 이후 기원전 515년, 스룹바벨을 총독으로 한 유대는 성전을 짓게 된다. 이른바 스룹바벨 성전인 이 성전은 하지만 솔로몬 성전 낙성식 때 이루어진 하나님의 현현같은 기적은 전혀 없었다. 예수님 탄생을 막으려 2살 이하 남자아기를 무참히 학살한 헤롯대왕도 성전을 지었으나 역시 하나님의 현현은 없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음성과 함께 나타난 비둘기를 떠올리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아브라함-이삭-야곱에 이어 모세로 이어진 하나님의 현현이 성막과 솔로몬성전의 언약궤를 통해 나타났다가 에스라, 느헤미야가 활동하던 스룹바벨 성전 그리고 헤롯성전을 그냥 지나치고 마침내 예수님의 탄생에서 현현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한 장소로서 과거에는 ‘일정한 공간’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새로운 방식의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예수그리스도 그 분이 그것이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오순절 성령을 통해 더욱 ‘신비한 연합’을 경험하게 하셨다. 예수님을 남남으로 현현을 경험하게 했지만 이제부터는 성령을 소유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 현현의 새로운 장소로 바뀐 것이다. 성막과 성전, 언약궤에서만 가능했던 하나님과 만남이 내 자신의 몸에서 이루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너희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라고 주장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죄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시면서도 공의와 용서를 동시에 수행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여줌과 동시에 에덴동산 이후 인간과 다시 대연합을 이루고자 우리의 몸 가운데 현현하신 하나님의 주도적인 섭리를 체험하도록 한 것이었다. 성육신은 2000년 전에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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