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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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 김찬현
  • 승인 2006.11.27 13: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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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법인 명희의료재단 이사장 김규현집사
 

온통 세상이 빨갛고 노란 단풍색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이내 입에서 하얀 입김이 거침없이 나오는 겨울이 시작됐다.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마다 행여 추울까 두꺼운 코트에 목도리까지 한 차림이 차가운 바람은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추운계절이 시작되면 우리의 가슴한편을 아리게 하는 우리의 이웃들이 있다. 바로 병들고 소외됐지만 어느 누구하나 돌보지않고 버려진 사람들이다.


겨울의 문턱에서 만난 명희의료원 이사장 김기현집사(아름다운교회)는 정신병력이 있거나, 알콜중독, 각종 장애 등으로 인해 가족들에게 버림받아 어려운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재활, 치료 사역을 하고 있어 누구보다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던가. 누구나 다 롤러코스터처럼 인생을 살다보면 높은 곳부터 낮은 곳까지 모두 겪었다는 김집사. 청와대 대통령경호원, 1급관광호텔 경영자가 그의 인생에서의 정점을 말해준다.


“보통사람들은 흔히 청와대경호원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청와대 건물을 지키는 경호원과 대통령 한분을 지키는 대통령경호원은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저는 1974년 박정희전대통령을 경호하면서 경호원생활을 시작해 최규하, 전두환 전대통령의 임기초기까지 경호원으로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8년을 모신거죠.”
충성심 하나로 유사시에는 대통령을 위해 죽기까지 각오해야하는 경호원 생활을 8년으로 마감하고 시작한 것은 1급관광호텔 경영자. 그야말로 내려올줄 모르는 인생의 오르막을 살았던 셈이다.

이런 그가 충청도 시골에서 알콜중독,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이름도 빛도 나지않는 일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어린 시절 그의 손을 이끌고 수십리 길을 걸어 교회로 향했던 할머니의 신앙을 이야기한다. 김집사가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김해 진영이라는 곳. 지금은 차로 달리면 부산에 엎어지면 코닿을 곳이지만 그때만해도 시골 중의 시골이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주일이 되면 새벽부터 일어나 곱게 단장하시고 저를 앞세우고 교회를 나셨습니다. 30리 길을 꼬박 걸어 교회를 갔다오면 친구들과 노는 것은 포기해야만 했죠. 가끔 친구들과 놀고 싶어 ‘할매, 오늘만 안가면 안되나?’하고 물어보면 어김없이 ‘예수님이 기다리시니까 안되제’하며 구수한 사투리로 말씀하셨던 게 아직도 생생합니다. 또 5일장이면 가마니를 짜서 판 돈 1원짜리 지폐를 뜨거운 솥두껑에 다려서 주일마다 헌금으로 내던 할머니의 정성은 신앙생활이 어떤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그가 어린 시절 다니던 진영교회는 12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의 증조모가 처음 신앙을 가지고 자신의 며느리들을 전도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것이 계속 이어져 그의 어머니와 김집사, 그리고 지금은 김집사의 손자들까지 이어져 6대째 신앙을 지켜오고 있다.

언제나 신앙이 제일 우선이었던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 역시 지금껏 모든 일에는 예수님 제일이라는 가치관이 깊이 뿌리박혀있다.

유도로 명성을 떨치던 부산 동아대학교에서 유도선수 생활을 시작해, 군 입대후에도 선수생활을 계속했다. 덕분에 대학을 졸업했을 때는 교사자격증을 받아 대구 영남고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당시 육영수여사 저격사건이 일어나고 청와대 경호원을 보강하면서 그는 유도특기자 자격으로 대통령경호실에 들어가게 된다.


대통령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야만 하고, 명령과 복종이 생명인 경호원 생활, 그것은 곧 신앙생활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신앙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경호원생활동안 그는 어떻게 그의 신앙을 지켜나갔을까.

“박정희 전대통령께서는 골프를 많이 즐기신 편이었습니다. 주일에는 반드시 골프를 치러나가셨는데 저도 항상 수행해야했기 때문에 주일 성수를 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어렸을때부터 주일은 반드시 지켜야한다고 할머니로부터 배웠는데 주일을 지키지 못하니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멀리서 교회종소리가 ‘댕그렁 댕그렁’ 하고 들리면 ‘예수님이 나를 부르시는구나’하는 생가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골프장 소나무 밑에 서서 잠깐동안 ‘하나님, 교회가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8년동안 경호원생활을 통해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 후, 그는 자신의 영적인 아버지라고 말하는 명성교회 김삼환목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돕게된다.

“명성교회가 개척했을 당시 10명의 집사가 있었는데 제가 그 중 한명이었습니다. 제 나이면 당연히 장로가 됐어야하지만 목사님의 개척을 도운 사람으로서 장로보다는 그저 집사로써 목사님 주변에서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장로 직분을 받지않았었죠.”


그는 명성교회가 대형교회로 성장할 수 있도록 온힘으로 섬기고 봉사했다. 해마다 명절이면 친척들이 모이는 경남 김해에 내려갔다가도 주일이 끼여있으면 어김없이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예배를 드리고 다시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내려가기를 수차례. 말도 없이 주일만 되면 사라지는 그에게 다들 어디갔다왔냐고 뭐그리 어렵게 신앙생활하냐고 말했지만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변하지않았다. “어쩌면 보수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하나님 앞에서 원칙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며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원칙조차 지키지않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인생에서 밝은 시기가 있다면 당연히 어두운 시기도 있는 법이다. 그것이 인생의 규칙과도 같은 것이다. 8년간의 대통령경호원 시절을 끝내고 신앙적으로는 명성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사회적으로는 1급관광호텔을 경영하는 경영자로써 승승장구를 이루던 그에게 1998년 IMF라는 시련이 시작됐다.

“겉으로 보기에 저의 삶은 어느 것하나 흠잡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맨 앞에 세우고 모든 일을 해나갔고, 신앙적이지 않은 것에는 돌아보지도 않았으니까요. 제가 경영하던 호텔도 로비에서 항상 설교방송을 틀고 찬송이 흘러나오도록 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자 노력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IMF로 인해 부도라는 큰 시련을 맞게 된다. 사실 사업하는 사람치고 부도한번 맞지않으면 사업하는 게 아니라는 말도 심심찮게 하지만 부도라는 상황은 그가 받아들이기 쉽지않았다.

“당시는 특급호텔을 빼놓고 많은 호텔들이 부도를 맞던 상황이었습니다. 6개월동안 유예기간을 줄테니 어음과 수표들을 모두 회수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니 뜻이 있겠지’하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정점에서 밑바닥까지 떨어진 김집사는 영등포 구치소의 찬 마루바닥에서 다시 하나님과 만나게 된다.

“처음 구치소에 들어가 있으니 주기도문도 안 외워지더라구요. 한마디로 불평이 가득찼죠. ‘왜 나입니까’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라며 3개월동안 하나님 앞에서 불평만 쏟아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성경을 펴는데 회개하지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는 성경구절이 딱 나오는데 제 마음에 ‘아, 이건 내가 잘 못한거구나’하는 생각이 퍼뜩 떠오르더군요.”


완전하게 희망과 소망이 사라졌을 때 회개가 시작되는 것일까. 모든 재산을 날리고 빈털터리가 됐던 그는 가슴 저 밑에서 끓어오르는 회개를 시작하게 된다.

“신앙생활 하는 동안 항상 행위에 자신있었던 그에게 하나님은 조건없는 순종을 말씀하시더군요. 항상 사업을 하면서 ‘하나님 이것만 해결해주시면 제가 이걸 하겠습니다’ 하는 조건을 걸었거든요. 그것부터 회개가 되는데 처음에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버티던 제가 80개나 되는 죄를 고백하게 되더군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다시 철저하게 낮아진 그에게 성령이 역사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다는 김집사는 3일 밤낮동안 그야말로 피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됐다.

“제 인생을 돌아보니 무엇 때문에 돈을 벌었나하는 회의가 들더군요. 성경에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끝없이 하시는데 헌신한 기억은 있지만 사랑을 실천한 기억은 없더군요. 그래서 ‘하나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이웃을 사랑하는데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하고 서원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제2의 인생. 닛시복지마을이라는 기도원을 만들고 3명의 알콜중독자들을 데리고 공동체를 시작해 지금은 70명의 환자들을 데리고 있다. 또 내년 1월에는 알콜중독, 정신지체, 장애인들을 보호하고 치료하는 병원을 개원할 예정이다.

“욕심이랄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때문에 다시 시작한 인생, 하나님이 주시는대로 벌어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는 하나님의 머슴이 되고 싶은게 제 욕심입니다.”라며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김집사. 하나님의 머슴이 되고 싶다는 그의 포부에서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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