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구원을 외면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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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구원을 외면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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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6.22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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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엽목사<기독교정화운동 대표>

 

우리의 신앙 가운데 해괴한 괴리가 있다면 현실구원에 대한 왜곡된 주장일 것이다.


대부분의 목사들 가운데 전도를 어떤식으로 하는가 하고 질문 해 보면 ‘예수 믿고 천당에 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 3:16절은 여지 없이 영생을 얻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오심의 근본 의미이며 또 주께서 요 6:63절에 말씀 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라고 하셨다. 영생을 강조 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가 영생을 강조하다 보니 교인들은 현실에서 신앙적 괴리를 경험하게 된다. 현실은 냉엄하고 차다. 돈이 없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그래서 교인들은 돈에 집착하게 되고 결국은 교회의 신앙과 현실은 별도라는 생각이 머리속에 자리잡아 외식신앙이 만연하게 된다.

나는 반드시 이 외식신앙의 확산에서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과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현실을 악한 것이며 영생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것인가?

우리는 우선 요3:16절을 상고해 보면 이어서 17절을 떠 올려 보아야 한다.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이 저로 말미아마 구원을 얻게하려 함이라고 한 것을 볼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생이 최고의 목적이요 가치지만 현실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성경의 거의 모든 비유나 교훈들, 사건들이 현실에서의 축복, 연민과 동참, 나눔으로 점철되어 있지 아니한가? 죄악으로 저주가 된 실존적 현실에 참여하여 그들을 구하고자 한 것이 또 하나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구원의 신학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현실구원의 진리성, 성경성을 다시 한번 상고해야 할 시기에 온 것 같다. 현실구원을 외면 해서는 안된다. 현실 구원의 현장에 참여 하여야 한다. 현실 구원의 장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정치신학, 경제, 의학, 복지 등) 거의가 다 광의의 간접적 신학이라 한다면 서민들에게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구원의 신학이라면 현실에서의 축복신학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우선 축복이 가장 목 말라하는 항목이다. 참으로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보면 너무도 무엇인가가 안되어서 죽고싶다느니, 이혼하고자 한다느니, 도망가려고 한다느니… 이런 것들 뿐이다.

성경은 얼마든지 현실 구원에 대한 약속과 계명들을 주셨다. 신 28:1-6, 요 14:21, 23 등 거의 모든 말씀들이 현실에서의 구원을 외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들을 강하게 외치지 못하는 이유가 목회자 자신들이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인가? 믿음도 적고 축복의 기본인 ‘말씀준행’을 외면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이들은 기복신앙의 강조라고 할것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 거의가 기복신앙인 것을! 다만 무속적, 육신적 기복신앙과 성경적,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적 기복 신앙은 다르다는 것 뿐이다.

논리적으로 따져도 빤한 이치다. 재래식 기복신앙은 정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욕구를 들어주시면 감당을 못하고 타락하고 만다. 절대 승리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의 축복은 반드시 계명의 준수라는 철저한 전제조건을 달고 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의 인격적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로의 변화는 성령을 통한 내적 인격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아무리 큰 축복을 하더라도 타락하지 않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교회는 성령의 변화를 통한 기독교의 축복의 이치를 십분 발휘하여 현실구원의 진리를 체현케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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