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 그 첫 시작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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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 그 첫 시작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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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4.0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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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호목사<한시미션 대표>


무게 1백40여g, 지름 7.23cm 정도인 작은 하얀색 공 하나에 온 국민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101년 만에 한국 야구가 미국 야구를 이겼다는 언론들의 보도에 온 국민의 어깨가 들썩거려지고, 사람들의 대화 주제가 온통 야구에 관련된 것들이다.

그런데 야구가 이 땅에 들어온 지 올해로 101년째라는 사실을 들으며, 우리는 한국에 야구가 도입된 그 연원에도 관심을 기울여 볼 필요를 생각해보게 된다.

실제 사료에 존재하는 한국 최초의 야구단 이야기가 ‘YMCA 야구단’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 영화화 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듯, 한국 최초의 야구단은 YMCA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 활동의 일부로서 야구가 도입된 것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 그때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청년들을 위한 원활한 선교를 위해 교회 아닌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생각을 모은다. 그리하여 언더우드, 아펜젤러 그리고 게일 선교사는 한국 학생 YMCA 창립을 생각하게 된다.

당시 상해 YMCA 총무로 있던 라이언 선교사가 파한(派韓)되어 재한 선교사들과 함께 5개월간 한국 청년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YMCA 국제위원회에 보고하였다.

그 보고를 받은 YMCA 뉴욕 본부에서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착수하게 되는데, 첫째는 한국에 파송할 전문 간사를 물색하는 일이었고, 둘째는 한국에 지을 YMCA 회관 건축비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YMCA 국제위원회는 한국에 파송할 실무 간사를 예일대학 출신의 질레트(Phillip L. Gillett)로 결정하고, 모아진 회관 건축비를 그를 통해 한국으로 보낸다.

드디어 1903년 10월 28일, 질레트 선교사의 주도로 서울에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라는 이름으로 한국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가 결성되었다. 당시 회원은 정회원 28명, 준회원 9명으로 조직되었다. 박영효, 민영환, 윤치호, 이상재, 유성준, 이원극, 남궁억, 신흥우 등의 인사들이 발기회원이었다. 이로써 한국 교회사는 물론이요,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으로서의 YMCA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첫 야구팀은 야구를 좋아하던 27살의 질레트 선교사에 의해 만들어진다. 한국 청년들과 가까워질 방법을 고민하던 질레트는 캐치볼(야구)을 하는 미국 병사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조선인들을 관찰한 후, 사람들을 모집해 야구의 기초 기술과 규칙을 가르쳤다.

1905년 봄, YMCA 임시 건물로 사용하던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 앞마당에서 질레트는 자신이 도입한 야구 장비를 회원들에게 전하고 조선 최초의 야구단인 ‘황성 YMCA 야구단’을 창단한 것이다.

이와 같이 초기 선교사들은 청년들을 위한 교회 아닌 교회 만들기에 힘썼다. 그 일의 한 통로가 되었던 초기 한국 YMCA는 복음 전도와 사회 운동을 함께 아우르며 한국 사회의 근대화와 한국 교회의 부흥에 기여하였다.

이렇게 20세기 초반부터 한국 기독교는 청년들을 폭넓게 끌어 안아가는 일에 힘썼고, 이를 통해 교육받고 생각을 넓혀간 청년들은 민족과 사회를 새롭게 움직여가는 동력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였다.

21세기를 시작하는 오늘, 한국교회들은 이 땅의 청년들을 어떻게 끌어안고 담아내며 그들에게 어떤 꿈을 심어주고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청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꿈을 꾸고 이 민족과 사회, 세계를 생각하게 될 때, 또 그 일이 선교적 사명과 함께 꿈틀거리게 될 때, 실로 아름답고 힘 있는 일이 이 땅 가운데 끊임없이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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