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관용의 예수영성이 양극화 치유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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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관용의 예수영성이 양극화 치유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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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1.25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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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 현실, 한국 교회의 대안은 무엇인가?’


한완상<대한적십자사 총재>

 
 
90년대 초반까지의 양극화는 정치권력의 정통성과의 관계에서 봐야 한다. 정치권력의 정통성이 결여되었던 정부가 빠른 산업화 성장을 이루면서 야기된 문제이다. 성과적 편법주의 말이다. 정당한 절차를 통해서 착실하게 걸어가는 사람은 낙후되기 쉽고, 편법만이 살 길인 것처럼 가르쳤다.


지금 양극화가 생기는 것은 정치적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의 양극화는 내적 이유에서도 기인하지만 상당히 글로벌한 데에서 더 기인한다. 세계화가 국가 간의 경쟁을 부추긴다. 이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서 국가는 생산성을 높여하고 그런 흐름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들은 잘 나간다. 유망한 대기업, 수출주도형 중소기업 등이 그 예이다.


그렇다면 이 양극화를 해소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양극화 해소를 위한 정부에 무게가 실려야 한다. 대통령과 집권여당이 힘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 시점에서는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기에 이제는 논의할 때이지 갈라져야 할 때가 아니다. 이제는 노·사·정 간의 대타협이 있어야 한다. 대타협을 하려면 상대방 입장에 서려는 역지사지의 성숙한 자세이다.


과연 한국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 역지사지할 수 있는 그런 입장에 있는가? 제도화된 종교는 교리화된 이념에 의해서 토대가 든든해지면 때로는 그것이 역지사지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기독교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가장 종교적인 기독교가 무슬림과 전쟁을 하지 않는가? 완전히 양극화된 그들이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가?

그러기에 영적인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원초적인 마음으로 돌아가자(빌 2장). 예수님의 마음을 품자. 예수님의 태도를 갖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내려가고 올라가는 것이다. 이 말은 세속적으로 말하면 높낮이의 양극화를 허무는 예수님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영적인 예수님의 영성, 역사적인 예수의 원초적인 영성은 두 가지 사건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예수님의 치유행동에서 나타난다. 그분은 치유하실 때 시시한 질병을 낫게 하시지 않았다. 정말 심각한 질병을 낫게 하셨다. 요즘 같으면 AIDS, 조류독감 등이다. 심각한 질병을 낫게 하신 것은 가장 밑바닥 인생의 고통에 동참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는 마땅히 성전에 들어가셔야 했지만 베데스다 연못으로 가셨다. 경쟁(競爭)에서 탈락한 외롭고, 천대받은 한 사람을 상대하셨다. 그 당시 거룩한 안식일법을 깨고 베데스다에 간 것은 국가보안법을 깨는 것과 같았다.


우리는 양극화를 주목하지만 요즘 참 재미있는 것은 균형화 현상이다. 그것이 바로 여성의 진출이 눈에 띄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향후 10년 후 고시 합격자의 과반수는 여성이 될 것으로 본다. 또 빠른 시일 안에 총리도 여성이 될 수 있다. 여성성은 품는 것이다. 암탉의 품는 원동력이 세계 흐름 가운데 한 주류이다. 영성, 여성성, 민중성은 예수님의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은 죽기 전에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관용을 말했다. 헬라어 원어는 “에피리에이케이라”다. 우리 성경에 보면 오래 참음, 자비, 사려깊음, 부드러움 등으로 표현한다. 그중에 가장 깊은 뜻은 이것이다. 그 당시는 정의를 포함한 정의보다도 더 소중한 가치이다. 그 당시 정의는 저울이었다.


교회가 이 가치를 보여줄 수 없다면 소금과 빛의 비전이 없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심각한 양극화, 국내의 양극화가 심각하다. 이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양극화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는가? 영적 종교인 기독교에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영성을 상실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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