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정치논리와 다른 차원에서 양극화 접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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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정치논리와 다른 차원에서 양극화 접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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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1.25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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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 현실, 한국 교회의 대안은 무엇인가?’


이인호 교수<명지대 석좌교수>


종교는 정치가 아니며 정치를 대행할 수 없다. 또한 교회가 감당해야 할 교육은 영성 교육이지 지성의 배양도 아니다. 따라서 양극화 문제를 보는 시각도 정치나 일반교육에서 보다는 달라야 하고 처방도 달라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이며 역사의 장에서 약한 자의 편에 서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는 의무를 스스로 짊어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단기간에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영성의 배양에만 만족할 수는 없고 보다 더 직접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현실적 대응도 불가피하다고 본다.

양극화 현상이 돌이킬 수 없는 내란의 불행한 사태로 치닫는 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다. 길게 정신사적 안목에서 볼 때 우리나라에서 이념적 양극화가 국가의 위기, 민족의 재앙으로 이어질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올 정도로 격화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사회 전체가 급격한 경제사회적 변화 속에서 너무도 오랫동안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진리를 외면하고 물신주의에 젖어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런 면에는 이념적 좌우 양쪽 간에 차이가 거의 없다. 또 어떤 면에서는 기회주의나 냉소에 빠져 산술적 중용을 지키는 사람들 보다는 차라리 이념적 선택을 분명히 하는 사람들에게 구제 가능성은 더 있다. 전자 가운데는 골수 친북 세력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오히려 높고 후자는 오만과 독선에 빠지는 위험은 안고 있다 하더라도 도덕적 정열, 곧 소명의식과 그에서 나오는 용기가 있기 때문에 서로 간에 대칭적 동질집단을 이룬다.

소명의식이 자기들을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했음을 깨달을 때 그들은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위해 방향을 바꿀 가능성이 없지 않고 양극화 대신 평화와 화해의 세상을 만드는 일에 다시 앞장 설 수 있는 가능성이 없지 않다. 왕년의 학생운동 투사들이 성실한 직업인과 가정인이 되거나 종교인이 되는 예도 종종 본다.


양극화 현상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집단과 집단 간의 대립만 주로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 집단들은 다수의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고 정치적, 이념적 입장을 같이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도덕적 지적 자질에는 큰 차이가 벌어진다. 심지어는 같은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인간적으로 똑같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결과 투쟁은 성실한 사람들 대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랑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지성 대 반지성이지 이념이나 계급적 혹은 민족적, 국가적 소속이 아닐 수 있음을 교회는 깨우쳐 줄 수 있다.


양심과 양식에 대한 호소로도 교회는 양극화 해소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젊은 시절 오도된 교육과 판단부족 때문에 잘못된 길로 들어섰던 것을 뒤늦게 깨닫는 사람들 가운데는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잘못된 것을 알면서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정으로 악랄한 짓을 하게 되는 사례를 많이 본다.

헛된 자존심이나 가족에 대한 체면 때문에 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을 교회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잘못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려는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양극화를 조장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념적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교회가 취해야 할 가장 큰 결단은 어느 쪽이 관념적 견지에서나 결과론적 견지에서나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가 하는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모든 힘을 쏟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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