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박물관 건축 10년 "오직 하나님께 의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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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박물관 건축 10년 "오직 하나님께 의지했다"
  • 이현주
  • 승인 2005.10.2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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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이전한 국립중앙박물관 총진행 맡은 기획운영단 기술서기관 정창성 집사
 

10월 28일 시민들에게 첫 선을 보인 국립중앙박물관은 세계 6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건축물이다.

총 공사기간만 10년.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박물관은 결국 용산 새 터에 자리 잡았다. 연면적
4천여 평에 웅대하게 세워진 국립박물관 뒤에는 마음 조리며 10년을 한 결 같이 박물관 건축에 매달렸던 숨은 주인공이 있다.

기획운영단 정창성 기술서기관(성실교회 안수집사). ‘집사님’, 또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더 익숙한 그가 이권과 청탁이 숱한 국책사업 진행과정에서 소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었다. 정집사는 박물관 건축에 쏟은 10년의 시간을 ‘하나님과 동행한 10년’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기일 내 완공이 어렵다는 주위의 우려를 뒤로한 채 믿음으로 추진한 개관날짜를 무리 없이 맞출 수 있었던 것 까지 모두 하나님이 보여주신 기적이라고 공을 돌렸다.

설계를 전공하고 기술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의 첫 임지 역시 박물관이었다. 건축을 총괄하는 것이 그의 업무. 처음 청주박물관을 시작으로 경주 월지관과 민속박물관 보수, 부여박물관 건립, 경복궁 중앙박물관 기획까지 그는 한 마디로 박물관 건축 전문가다. 박물관 기획부터 마무리까지 전 과정이 그의 손을 거쳐야만 했다.

완공 일정을 2002년에서 2005년으로 미루며 완성도를 높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 총 공사비 4천억원이 투입된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처음 설계를 공모할 당시 46개국에서 340여 작품이 신청됐다. 투명한 심사를 위해 설계도를 밀봉했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심사에 참여했고 아무도 어느 나라 누구의 작품인지 알지 못했다. 최종 심사에서 당선작을 발표할 때 모두들 깜짝 놀랐다. 한국의 ‘정림건축’이 세계 유수 건축가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공모에 뽑힌 것이다. 그 광경을 목격한 정창성집사는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백의민족’의 소박함이 담긴 건축설계. 정집사는 자신의 손으로 이 훌륭한 설계를 완성시키고 싶었다.

첫 삽을 뜬 후 총 8년에 걸친 공사기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공사기간이 길다보니 여러 가지 의견충돌이 일어나고 난관에 처할 때가 많았다. 헬기장 건설이나 연못 조성 등이 벽에 부딪혔고 도중에 시공사가 바뀔뻔한 위기에 처한 적도 있다. 이 모든 의견차를 조율하는 것도 정집사의 몫. 그는 새벽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지혜와 응답을 구했다. 그리고 오직 정도만을 걸었다. 설계 원칙을 지켜내는 것은 그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과도 같았다. 하나님이 옳다는 영감을 주시면 그대로 밀고 나갔다. 그에게 정답은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사실 정집사는 공무원으로 조직생활을 해나가기에는 불리한 조건이 많다. 남들만큼 뛰어난 배경을 갖지 못하다는 부족함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술을 거절하는 그의 신앙이 더 큰 걸림돌이었다.

성실교회에서 집사 안수를 받으면서 “술을 끊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그러다보니 유대관계도 없어지고 동료와상사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앙의 원칙을 하나씩 세워나가는 그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셨다.

술자리를 거절하다보니 각종 청탁이나 비리에서 멀어질 수 있었고 청렴하게 공무원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다. 이번 국립박물관 건축과정중에도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무성한 소문을 퍼뜨렸지만 모두 저절로 사그라졌다.

이미 주위 동료들이 그의 청렴함을 아는 터라 어떤 비방도 통하지 않았다. 10년을 한결같이 일해온 그에게 하나님은 세계적인 박물관 기획자라는 영광된 명찰을 허락하신 것이다.


정창성집사가 하나님을 알게 된 과정도 모두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진행됐다.

시골 농가의 3대 독자로 태어난 정집사는 종갓집 장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는 그에게 “너는 절대로 ‘야소’를 믿지 말아라”거듭 각인시켰다. 크리스마스면 몰려가는 교회 한번 나가보지 못했다.

그가 중3이 되던 무렵, 아버지가 복막염으로 수술을 받으셨다. 막대한 병원비로 가세가 기울고 장남인 그가 아버지 대신 농사를 지어야할 상황이었다. 결국 정집사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농사일을 도맡았다. 그런데 그의 고향 전남 고흥부근에 ‘미션스쿨’이 생겼고 장학생을 선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모님 몰래 시험을 치른 정집사는 장학생이 된 것은 물론, 우수한 성적으로 반장과 학생회장까지 맡았다.

미션스쿨은 그에게 문화적 충격이었다.

매일 예배를 드리고 일 년에 한 번씩 부흥회를 열었다. 반장이었던 정집사에게 학급예배를 인도하는 막중한 사명이 주어졌다. 성경도 찬송도 몰랐던 그는 자신의 집 가까이 있는 처소교회에 다니면서 기도하는 법을 배웠고 지방회 연합부흥회 등에 참석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주일학교 교사가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 담임목사님이 그에게 “고등학생이니 주일학교를 맡아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라”고 부탁했고 그 이후 지금까지 30년째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있다.

고교 졸업 후 그는 목회자의 길을 갈 것인지 일반 직장인이 될 것인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광주에 있는 제일기도원을 찾아 사흘간 금식기도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구할 때, 마침 그 곳에서 졸업사경회를 진행하던 한 목사님이 “자신의 일하는 처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설교했다. 그리고 정창섭집사는 “직장을 사역지로 삼자”고 결심했다.

“제가 일을 할 때는 꼭 한 번씩 하나님의 뜻을 되새깁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 나는 복음을 전하러 이 직장에 온 선교사다. 내가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고자 한다면 그만한 행동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전도자의 사명이다. 이렇게 다짐하며 직장을 사역지로 섬겨가고 있습니다.”

박물관 건축을 맡아 시작하면서 그는 박물관 직장선교회를 조직했다. 매월 목회자를 초청, 정기예배를 드린다.

“후배들 중에는 식탁에서 기도하는 것조차 꺼리는 기독교인들이 많아요. 본이 되지도 못하면서 기독교인이라는 티를 내는 것은 하나님을 욕 먹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더라구요. 그런 후배들에게 저는 믿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자신의 행동이 점점 달라진다고 조언합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끼리 그룹을 만들어 믿지 않는 이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박물관도 완공되면서 기도처소를 마련한 정창성집사는 자신이 만든 직장선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국립박물관을 건립하는 10년 동안 정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모든 일들이 의롭게 성취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게 된 것이죠. 국립중앙박물관은 저의 땀과 공로보다 하나님의 비전이 담긴 건축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계를 맡은 정림건축 김정철 명예회장 역시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진행자, 설계자가 모두 크리스천인 것은 하나님이 박물관 건축과정에 얼마나 많은 사랑을 부어 주셨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제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역사의 증거로 우뚝 세워졌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맞먹는 규모와 시설로 대한민국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그 속에 세워진 정창성집사. 교회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박물관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그와 동행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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