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라는 선교 역사를 쓴 조선의 첫 번째 목사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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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라는 선교 역사를 쓴 조선의 첫 번째 목사 선교사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4.02.07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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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② 개척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상)

한국명 원두우(元杜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한국기독교 140주년 선교 역사에서 ‘최초’라고 불릴만한 업적이 두드러진 선교사이다. 1884년 최초의 정주(定住) 선교사가 ‘알렌’이었다면, 언더우드는 최초의 목사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은 사람이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정적이었던 언더우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 백성에게 ‘복음’을 직접 전파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선교뿐 아니라 교육과 출판, 의료 등 그가 썼던 최초의 역사는 한국교회 성도뿐 아니라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첫 발자국들을 따라가며,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사용하셔서 한국교회 부흥의 토대를 이루셨는지 살펴본다. 

목사가 되기 위한 꿈과 도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는 미국 태생이 아니다.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의 신앙의 명문가 집안에서 3남 2녀 중 다섯째로 출생했다. 조부모와 부모님이 신실하고 헌신적인 모범을 보여준 영향으로, 언더우드 형제들은 어릴 적부터 신앙 유산을 잘 물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언더우드가 6살 때 어머니가 여섯째를 출산하다 아기와 함께 사망했고, 곧이어 할머니까지 세상을 떠난다. 사업을 하던 아버지 존 언더우드가 파산까지 하게 되면서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 것. 아버지의 재혼 후 미국에 정착한 언더우드 가족은 개혁주의 신학에 바탕을 둔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했다.

형제들과 교회 놀이를 할 때부터 설교를 도맡았던 언더우드는 목사가 꿈이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가족들은 언더우드의 교육을 지원했고, 그에 부응하듯 언더우드의 향학열은 높았고 실력도 출중했다. 1877년 뉴욕대학교 인문학부에 입학한 언더우드는 매일 11km를 걸어서 왕복하면서도 5시간만 자며 공부에 매진했다.

1881년 6월 뉴욕대를 졸업하고 그해 9월 곧장 뉴브런즈윅신학교에 입학했다. 역시 신학교에서도 학부 시절과 같이 열정적으로 공부하며 목사가 되기 위한 훈련에 매진했다. 언더우드가 뉴브런즈윅신학교에서 일반 목회자가 아니라 선교사로서 비전을 갖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신학교 3학년, ‘신학교 간 선교사 동맹’(Inter-Seminary Alliance) 제4차 총회에 참석할 당시 프린스턴신학교 알렉산더 호지 교수가 “은둔의 나라 조선이 이제 문을 열었다”며 선교사로 헌신을 도전했던 것. 흥미로운 건 345명 청년이 모였던 그 현장에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 땅을 밟았던 미국 북감리회 초대 선교사 아펜젤러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생각하게 한다. 

1890년대 이전 서울 중구 정동 일대. 언더우드 선교사가 정착한 이후부터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주로 이곳에 머물렀다. 깃대가 보이는 곳이 바로 미국공사관이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끈질기게 선교사 파송 요청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됨으로써 선교사가 파송될 수 있게 됐다는 도전에 청년들의 가슴은 뜨거워졌다. 복음이 필요한 1,300만명 가운데 개신교 선교사가 없다는 도전에 언더우드는 뜨거워졌다. 그렇게 조선을 알게 됐지만, 그는 인도로 향하고자 했다. 

이후 언더우드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인 건 ‘이수정’이라는 조선인이 <The Illustrated Shristian Weekly>에 실은 기고 때문이었다. 미국인들을 향해 선교사 파송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이수정은 일본 체류 중 성경을 번역한 그 인물이다. 

글을 읽은 언더우드는 개혁교회 해외선교부를 찾아가 조선 파송을 요청했다. 수차례 찾아가도 거부되자 목회자 선교사 파송 계획이 있다는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로 향했다. 독신이었던 그를 여러 번 거절하자 교회 청빙을 받아두고 있던 언더우드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에 선교부를 찾아갔다. 결국 언더우드의 열정이 선교부를 움직였고, 1884년 7월 조선 선교사로 파송을 결정했다. 

언더우드는 개혁교회에서 장로교회 목사로 소속을 변경했다. 1884년 12월 뉴욕을 출발한 언더우드는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태평양과 마주한 ‘샌프란시스코’에 당도한다. 그해 마지막 날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 그는 1월 25일 요코하마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조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조선어를 배우며 선교를 준비했다. 특별히 요코하마에서 이수정을 만났는데, 이수정은 자신이 번역한 <마가복음> 1천부를 인쇄해 조선으로 향할 선교사에게 전하고자 기다리고 있었다. 또 미 북감리회에서 파송한 아펜젤러 부부, 스크랜턴 부부, 이화학당 설립자이자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도 만났다. 

마침내 언더우드는 1885년 3월 25일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나가사키 항구를 출발해 4월 2일 부산항에 기착한 후 4월 5일 부활주일에 목적지였던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사실 갑신정변 이후 외국인을 향한 인식이 좋지 않아 미국 공사관은 선교사가 3명이나 오는 걸 강하게 반대했다. 알렌은 언더우드를 환영하겠지만, 독신이기 때문에 만류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탓에 아펜젤러는 임신 중인 부인이 위험해질 수 있어 제물포에 도착한 지 5일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입경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친 발걸음이었다. 알렌은 4월 10일 문을 여는 광혜원을 위해 함께 일할 사람이 필요했고, 이때는 오히려 포크 공사를 설득해 언더우드를 서울로 데려왔다. 언더우드가 미국에서 1년 동안 의학을 수련한 덕에, 제중원에서 약제사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물리와 화학 등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뉴욕대에서 기초과학을 열심히 공부했기에 가능했다. 조선 조정은 당시 선교사 활동에 예민했기 때문에 제중원은 선교사들에게 안정적 기반이 되어 주었다. 

조선 선교의 기초를 닦다
조선에서 활동을 시작한 언더우드는 곧장 조선어 공부에 돌입했다. 미국에서도 언더우드는 누구보다 언어에 탁월했다. 조선에서도 어떤 선교사보다 빠르게 말과 글을 배웠다. 조선에 온 지 일 년이 되지 않았을 때, 제중원에서 조선어로 수업할 정도가 됐다.

언더우드는 다가올 미래를 생각했다. 조선에 올 선교사들을 위해 조선어 문법서와 영한사전을 만들기로 했고 곧장 실천했다. 바쁜 선교사역 중에도 1889년 435쪽 <한영문법>, 1890년 한국 최초의 영한·한영사전 <한영ᄌᆞ뎐>을 출판하는 열매를 거뒀다. 지금 우리가 활용하고 있는 사전의 출발이 언더우드이다. 언더우드의 노력은 성경을 완역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이혜원 연구교수는 “언더우드 문법서는 조선에 적합한 품사 체계를 최초로 제시한 문법서이기 때문에 현대 국어학자들이 특히 주목하고 있다. 서양 품사와 문법 체계를 빌려 기술한 다른 책과 달랐던 것은 언더우드의 남다른 언어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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