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계시의 두 방편은 자연과 성경,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상태바
하나님 계시의 두 방편은 자연과 성경,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 박찬호 교수(백석대 조직신학)
  • 승인 2023.07.05 00: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찬호 교수의 목회현장에 꼭 필요한 조직신학 (17) 계시의 구분
박찬호 목사
박찬호 목사

시편 19편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1~6절은 피조 세계에 대한 찬양인데 특별히 해에 대해 강조하는 찬양시이다. 그런가하면 7~14절은 주님의 율법, 즉 토라에 대한 묵상을 담고 있는 지혜시의 일반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짐짓 딴판인 내용을 담고 있기에 시편 19편은 두 개의 시편을 함께 묶어 놓은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이해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자연계시와 함께 초자연계시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잘못된 이해라고 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시편 19편은 시편 8편과 시편 104편과 함께 창조시편으로 분류된다. 시편 19편이 낮 시간을 배경으로 한 창조세계의 장엄함을 노래한 것이라면 시편 8편은 밤하늘의 별을 보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한 시편이다. 이른바 대자연 앞에 선 다윗은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미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인은 멈추지 않는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씌워주신 영화와 존귀의 관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서의 영예를 누리게 되어 있다. 이른바 만물이 그의 발 아래 있다.

시편 104편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찬양하고 있지만 시편 8편과는 달리 그 가운데 인간 존재가 특별하다는 언급은 없다. 피조세계 전반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다.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도 먹이시고 마시게 하시며 들나귀들도 해갈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풀과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젊은 사자들은 그들의 먹이를 쫓아 부르짖으며 그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하다가 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들의 굴 속에 눕고 사람은 나와서 일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 도다”(시 104편 21~23절). 사자들이 하나님께 자신들의 먹이를 구한다는 표현이 이채롭기만 하다.

다시 시편 19편으로 돌아와 보자. 하나님은 우리를 자연계시에 근거한 자연종교의 불확실성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래서 시편 19편의 앞부분에 이어지는 두 번째 단락(7~10절)은 하나님의 율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노래하고 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편 19편에는 이렇듯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의 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그리고 “여호와의 법” 등의 6가지 다양한 명칭이 등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확실하며 정직하고 순결하다. 그래서 영혼을 소성시키며,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한다. 눈을 밝게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고 진실하여 다 의롭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당연히 이 말씀을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해야 한다. 이 말씀은 송이꿀보다 더 달다.

시편 19편은 두 가지의 하나님의 계시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본 시편 기자의 기도로 마무리되고 있다. 우리는 알고도 연약하여 넘어지는가 하면 죄인줄 모르고 죄를 짓기도 한다. “숨은 허물”(12절)은 말하자면 죄인줄 모르고 짓는 죄를 말한다. “고의로 짓는 죄”(13절)는 죄인줄 알고도 이런 저런 이유로 저지르는 죄인데 이런 죄는 우리를 주장하기도 한다. 시편 19편의 마지막 절인 14절은 자못 유명하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개혁주의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의 두 방편을 인정한다. 첫째는 자연이고 둘째는 성경이다. 초기 개혁주의신학의 문서인 벨기에 신앙고백(1561년)은 이를 하나님을 아는 두 가지 방편으로 인정하고 있다. 말하자면 자연은 하나님을 아는 큰 책이고 성경은 작은 책인 것이다. 이전에는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로 구분하던 것을 최근에는 이런 구분을 버리고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분류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계시가 어느 정도는 모두 초자연적인 면이 있기 때문이고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도 비록 왜곡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초자연적인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의 구분이 계시의 기원이나 양상에 따른 구분이라면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구분은 계시의 범위와 목적에 따른 구분이라고 할 수 있고 최근 들어서는 후자의 구분이 더 선호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