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향한 손길이 만들어낸 ‘섬김의 선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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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향한 손길이 만들어낸 ‘섬김의 선순환’
  • 한현구 기자
  • 승인 2023.01.04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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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예수의 손을 잡다(2) 이 땅의 나그네로 온 외국인

수천, 수백억을 들인 예배당이 랜드마크처럼 위풍당당히 서있다. 연합예배라는 이름으로 모인 수백명의 찬양대는 유수의 합창단 부럽지 않은 웅장한 소리를 뽐낸다. 5천만의 인구 중 기독교인이 천만에 육박한다고 자랑하는 우리나라다. 그러나 우리는 냉정히 성찰해보아야 한다. 뾰족한 첨탑과 수많은 군중, 번듯한 옷들과 재물 사이에서 우리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예수는 어디 계시는가.

예수는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화려한 왕궁에서 귀족들과 어울리지도, 개선 깃발을 휘날리는 군대의 선봉에 계시지도 않았다. 오히려 가난한 군중들의 일상 속 거리에서, 먹을 것조차 변변치 않은 들녘에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종의 형상을 자처하신 그분은 언제나 가장 환영받지 못하는 곳에 계셨다.

그분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너희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과연 이 시대 교회의 시선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향해 있는가. 어쩌면 화려함에 눈이 멀어 우리 곁에 있는 작은 예수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23년을 시작하며 작은 예수의 손을 잡는 현장을 찾아봤다. <편집자주>

영원한 찬양 몽골인교회 누스트 바야라 목사.
영원한 찬양 몽골인교회 누스트 바야라 목사.

기독교의 불모지 몽골에서 20년을 사역했다. 누스트 바야라 목사는 기독교 인구 1% 미만의 미전도 종족 가운데서 눈물로 모국을 위해 기도하며 척박한 땅을 일궜다. 자그마치 5개 교회를 세웠고 중국 내몽골 지역으로 3명의 선교사도 파송했다. 하지만 반갑지 않은 손님이 그의 열정에 제동을 걸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급성간경화였다.

의료 기반이 다소 열악한 몽골에서는 방법이 없었다. 의료진은 고개를 내저으며 한국행을 추천했다. 그렇게 201411월 방문한 한국. 간 이식이 필요했지만 의료보험이 없는 외국인에겐 감당하기 힘든 청구서가 제시됐다. 치료에 필요한 비용은 2. 한국인에게도 부담이 큰 금액을 몽골의 목회자가 떡하니 마련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강도만난 바야라 목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을 붙여주셨다.

 

고난 중에 만난 도움의 손길

청구서에 찍힌 0의 개수만큼이나 갈 길이 멀어보였다. 비자 문제가 해결되면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아는 이 하나 없는 이방인의 땅 한국에서 도움을 받을 길은 요원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야라 목사를 위한 도움의 손길을 예비해 놓으셨다. 우연치 않게 만난 조래자 목사(서부영락교회)가 바야라 목사의 비자 발급을 도왔고 덕분에 간 이식 수술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단 한 문장으로 서술되지만 일면식도 없는 외국인 목사를 믿고 보증해 비자를 받도록 돕는 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그런데 조 목사의 도움은 비자를 받도록 보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원래는 치료를 받고 돌아가려 했는데 담당의사 선생님이 극구 말리셨어요. 수술은 40이고 재활이 60인데 몽골로 돌아가면 책임질 수 없다고요. 그래서 치료 기간 머물 반지하 방을 구했는데 조래자 목사님이 방을 찾아오시더니 가구와 가전제품, 주방기구를 전부 마련해주셨습니다. 이전까지 친분이 전혀 없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행정과 일상 전반에서 도움을 주셨어요.”

살날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선고까지 들었던 바야라 목사는 8년이 지난 지금 건강을 되찾고 영원한 찬양 몽골인교회를 개척해 한국에 온 몽골인들의 영적 아버지가 됐다. 이후 몇 번의 수술이 있었고 1년에 몇 번은 병원을 찾아야 하지만 도움의 손길이 없었다면 상상하기 힘들었을 미래다.

재한 몽골인교회 중 최초의 자립교회로 세워진 영원한 찬양 몽골인교회.
재한 몽골인교회 중 최초의 자립교회로 세워진 영원한 찬양 몽골인교회.

스스로 일어난 25세 몽골교회

지극히 작은 자를 향한 섬김은 선순환을 만들어냈다. 외국인 목회자를 향한 도움의 손길이 자립 몽골교회의 설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몽골인교회를 개척한 바야라 목사는 이제 한국에 있는 다른 몽골인들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면서 섬김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재활을 위해 한국에 머무르던 초기, 바야라 목사는 한국에서 드려지는 몽골어 예배 자리를 찾아갔다. 그런데 다니면 다닐수록 단순한 몽골어 예배가 아닌 몽골인들의 교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치료를 위해 찾은 한국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새로운 사역의 길로 인도하셨다.

대부분 몽골어 예배는 한국 목사님이 설교하시고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몽골인이 통역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닌 그저 한국말을 잘하는 몽골인을 통역으로 세우다보니 황당한 일도 많이 벌어져요. 심지어는 사탄도 좋은 존재라고 통역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몽골 현지에서 오랜 기간 목회를 할 때 한국에서 교회를 다니다 몽골로 돌아온 사람들을 많이 만났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몽골에서는 교회를 가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그땐 이해를 하지 못했는데 한국에 와서 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는 제대로 된 영접과 신앙의 성숙이 이뤄지기 힘들었다.

세워진지 10년이 넘은 몽골인 예배도 찾아봤지만 성도들이 드리는 헌금은 고작 한 달에 만원 정도. 예배에서 몽골인들이 하는 가장 큰 사역은 헌금통을 드는 것에 그쳤다. 설교와 섬김 모두 한국인의 주도로 이뤄지고 있었고 몽골인은 그저 잠깐 예배당에 앉았다 가는 손님에 불과했다.

처음엔 지구촌교회 몽골어 예배부에서 2년 반을 섬겼다. 한 번도 몽골 목사의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몽골인 성도들의 요청에 시작된 인연이었다. 섬기는 동안 30명 정도의 5개 소그룹 모임이 만들어졌고 찬양 인도도 몽골인들이 맡게 됐다.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나는 것을 보며 떠나기 힘들었지만 자립 몽골교회를 세우겠다는 비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모두가 말렸음에도 그는 스스로 좁은 길을 택했다.

많은 분들이 의아해했죠. 한국 목회자도 지구촌교회같은 대형교회에 가기 힘든데 왜 나오려고 하느냐고요. 자녀가 여섯이나 되는데 어째서 안정적인 삶을 내려놓느냐고 만류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어요.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있기 때문에 그분을 의지하며 몽골인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몽골인교회를 개척한지도 벌써 7년째. 월세를 내기도 빠듯한 광야의 길을 선택하면서도 보람은 넘친다. 성도들은 고맙게도 스스로 십일조를 5만원씩 더 내서 월세를 채우자며 헌신해줬다. 교회가 있는 경기도 광주 인근에 거주하는 몽골인들은 약 5천여 명. 교회가 이들을 위한 몽골타운 역할을 감당하며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 바야라 목사의 꿈이다. 지금은 교회 아래층에 몽골식당도 열고 찾아오는 몽골인들을 만나 예수를 전하고 있다.

재한 몽골교회가 처음 세워진 것이 25년 전입니다. 초기에야 당연히 지원이 필요했겠지만 이젠 어렵더라도 스스로 결정하고 일어서야 하는 시간이 됐습니다. 유아기를 지나 어른이 되면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것처럼요. 25년의 재한 몽골교회 역사에서 처음 자립한 우리 교회가 다른 몽골교회의 모델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스스로 섬기고 스스로의 헌금으로 세워지고 우리의 목소리로 찬양할 수 있어야 몽골에 돌아가서도 신앙생활을 놓지 않을 겁니다. 도움을 받던 몽골인들이 다른 몽골인을 섬기고 한국에 있는 모든 몽골인들이 교회를 다닐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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