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속 맞이하는 두 번째 성탄…“라떼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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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속 맞이하는 두 번째 성탄…“라떼는 말이야”
  • 정리=손동준 정하라 기자
  • 승인 2021.12.21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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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사역자들이 추억하는 그때 그 시절 성탄절
새벽송·문학의 밤·올나잇, 추억으로 남은 문화들
‘통금’도 성탄절만큼은 해제. 1945년 도입된 야간통행금지는 1982년까지 계속됐다. 야간통행금지 제도는 사상 통제, 국가안보 수호, 정치적 저항세력 억압을 위해 국민들의 시·공간을 제한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야간통행금지제도 시행 아래 일반 시민들은 일상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성탄절만큼은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자유의 날이었다. 이런 세태를 반하기라도 하듯 1981년 12월 25일 한 일간지는 ‘고요했던 성탄전야, 통금 없어도 별 탈 없다’는 제목으로 1면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사진은 1965년의 크리스마스 거리풍경. 출처:국가기록원.
‘통금’도 성탄절만큼은 해제. 1945년 도입된 야간통행금지는 1982년까지 계속됐다. 야간통행금지 제도는 사상 통제, 국가안보 수호, 정치적 저항세력 억압을 위해 국민들의 시·공간을 제한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야간통행금지제도 시행 아래 일반 시민들은 일상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성탄절만큼은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자유의 날이었다. 이런 세태를 반하기라도 하듯 1981년 12월 25일 한 일간지는 ‘고요했던 성탄전야, 통금 없어도 별 탈 없다’는 제목으로 1면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사진은 1965년의 크리스마스 거리풍경. 출처:국가기록원.

코로나는 크리스마스 풍경마저 바꿔놓았다. 흥겨운 캐럴과 성탄 트리로 연일 인파가 넘쳤던 거리는 거리두기 조치로 한산해졌다. 특히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곳은 교회다.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은 최대의 축일이지만, 12월 들어 확진자 수가 급증하면서 필수적인 행사를 제외하고는 일절 취소하는 분위기다.

비단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다. 언젠가부터 교회에서 열어왔던 크리스마스 모임들이 어느때부턴가 축소돼온 것도 부인할 수 없다. 2년째 코로나 속 조용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과거의 추억을 회상해봤다. 특별히 한국교회와 함께해 온 세대별 문화사역자들을 통해 그들이 기억하는 크리스마스 풍경들을 되새겨봤다.<편집자 주>

추억의 새벽송 지금도 몇몇 교회에서는 성탄절 새벽 교인들의 집을 방문해 찬양을 부르는 새벽송을 하지만 이제 전에 비해 찾아보기 힘든 풍경으로 남아있다. 사진은 1950년대 새문안교회 성가대의 크리스마스 새벽송 모습. 출처:사진으로본새문안100년.
추억의 새벽송 지금도 몇몇 교회에서는 성탄절 새벽 교인들의 집을 방문해 찬양을 부르는 새벽송을 하지만 이제 전에 비해 찾아보기 힘든 풍경으로 남아있다. 사진은 1950년대 새문안교회 성가대의 크리스마스 새벽송 모습. 출처:사진으로본새문안100년.

 

 2천원 짜리 선물 교환,
‘문학의 밤’은 전도의 장

최인혁 목사(62세) / 찬양사역자

1세대 찬양사역자로 40년 넘게 한국교회와 동역하고 있는 최인혁 목사.
1세대 찬양사역자로 40년 넘게 한국교회와 동역하고 있는 최인혁 목사.

‘크리스마스’ 하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77년 무렵 제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인데요. 그 당시 크리스마스를 즈음해서 교회마다 ‘문학의 밤’ 행사를 여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마음 맞는 친구들 네 명이 중창단을 만들어서 교회마다 다니며 공연하러 다녔습니다. 실력이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여기저기 불려 다닌 거죠. 

저희가 공연을 했던 한 교회에서 성탄절 행사에 초청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올 때 한 사람당 2천 원가량의 선물을 준비하라더군요. 이것도 당시에 유행하던 이벤트였는데요. 가져온 선물들을 전부 가운데에 놓고 교환하는 겁니다. 

당시 저희는 참 철이 없었어요. 장난기가 발동해서는 돼지고기 2천 원어치를 사서 포장지에 싸서 내놨습니다. 마침 한 여학생이 그 선물을 골랐고, 포장을 열어보고는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장난을 쳐도 기분 좋게 칠 걸, 왜 그랬나 싶네요. 

교회는 끼 넘치는 청소년들의 집합소였다. '좀 한다'는 친구들은 모두 교회로 모였다. (사진 제공:최인혁 목사)
교회는 끼 넘치는 청소년들의 집합소였다. '좀 한다'는 친구들은 모두 교회로 모였다. (사진 제공:최인혁 목사)

아무튼, 당시 한국교회는 끼가 넘치는 청소년들의 집합소였습니다. 그런 끼가 모여서 ‘문학의 밤’이라는 행사로 이어진 거죠. 문학의 밤을 열면 전도를 안 해도 전도가 됐어요. 당시 교회가 아니면 어디에서도 그런 무대를 볼 수 없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는 제법 규모가 있던 편이라 무대를 꾸미고 조명까지 쏴주면 구경 온 친구들이 ‘와’하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요즘 TV를 보면 ‘고등래퍼’니 ‘스트리트 걸스 파이터’니 하는 고등학생들이 나오는 프로그램들이 있는데, 문학의 밤이 당시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교회의 문화적 수준이 높았을 때죠. 그뿐만 아니라 공부 잘하는 것 빼곤 튀기 어려운 아이들이 각종 달란트를 뽐내고 그로 인해 칭찬받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곳이 교회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금도 음악 하는 친구 중 다수가 교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때만 해도 음악 하는 친구라면 100% 교회 출신이었습니다. 오늘날 세계 무대를 휩쓸고 있는 ‘K 콘텐츠’가 있기까지, 저변에는 교회의 풍성한 문화가 있었다고 자부합니다. 

교회는 끼 넘치는 청소년들의 집합소였다. '좀 한다'는 친구들은 모두 교회로 모였다. (사진 제공:최인혁 목사)
90년대 후반, 연말이면 교회에서 진행하는 문화행사가 넘쳤다. (사진 제공:최인혁 목사)

1세대 찬양사역자로 오랜 시간 교회와 함께 동행해왔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교회의 문화적 역량이 세상보다 약해지고 있음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또 한 번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며, 한국교회의 르네상스를 기대해봅니다.

 

새벽송·올나이트 추억 
따뜻했던 축복의 시간

백광훈 원장(48세) / 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 원장으로 한국교회의 문화 현상을 해석하고 새로운 트랜드를 제시하고 있는 백광훈 목사.
문화선교연구원 원장으로 한국교회의 문화 현상을 해석하고 새로운 트랜드를 제시하고 있는 백광훈 목사.

어떤 음식 칼럼니스트가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라고 했다지요. 교회생활을 어렸을 때부터 했던 40대 이상 장년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 관련된 기억의 많은 부분은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추억일겁니다. 예수님 탄생을 기념하는 성극을 하며 마리아와 요셉도 되어보고, 인정머리 없던 베들레헴 여관주인도 되어보았던 시간들이었지요.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시간은 더욱 특별했습니다. 교회에서 옹기종기 모여 성탄전야를 준비하곤 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성탄절 전날, 교회에 모여 선물 교환을 하며 밤을 새는 ‘올나이트’를 하기도 하고, 새벽 무렵에 성도님들 댁을 방문하며 ‘새벽송’으로 서로를 축복했던 아름다운 순간들이었습니다. 성탄절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더욱 찾아 사랑을 나누었던 시간이기에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성탄절은 마음 따뜻해지는 시간들로 기억됩니다.

안타깝게도 성탄의 풍경들은 많이 변해버렸습니다. 아이들은 학원 다니느라 성극 준비는커녕 교회에 올 시간조차 없습니다. 수많은 볼 것, 놀 것들이 시선을 사로잡고, 이런저런 송년 모임에 분주해진 마음에, 성탄절은 그저 예배 한 번 드리고 지나가는 행사로 바뀌어 버린 것은 아닐까요. 성탄은 생명의 선물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구원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삶의 자리에서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일은 멀리 동방에서 온 박사들처럼 시간의 수고와 준비를 통해 가능할 겁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또 우리 자신에게 성탄의 기쁨을 선물할 수 있는 2021 특별한 성탄절이 되길 소망합니다.

 

성탄 전야, 북적이던 교회
환호하며 묵상했던 성탄

배가현(28세) / 유튜버 ‘Kei is loved’

다양한 콘텐츠로 젊은 크리스천을 대변하고 있는 유튜브 채널 ‘Kei is loved’를 운영하고 있는 배가현 씨.
다양한 콘텐츠로 젊은 크리스천을 대변하고 있는 유튜브 채널 ‘Kei is loved’를 운영하고 있는 배가현 씨.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던 터라 매년 성탄절이 되면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이 익숙했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하기 바로 전 주일에 진행했던 전야제는 언제나 기대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전야제는 각 주일학교 부서가 나와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성탄 발표회 같은 것이었는데, 제가 유년부 시절(대략 초등학교 저학년)에 동방박사 역할 중 한 명을 맡아 성극을 진행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향유와 몰약을 들고 별을 따라가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는 그 과정이 연기임에도 괜스레 설레고 즐거웠습니다. 

또 손에 촛불을 들고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는데 촛농이 손등에 떨어지는 데도 꾹 참고 찬양을 하다가 무대에서 내려오고 나서야 참았던 울음을 ‘와앙’하고 터트렸던 기억도 있습니다.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언니 오빠들, 친구들과 다 같이 성탄절 전날, 크리스마스이브에 담임 목사님을 비롯해 여러 교역자분의 댁에 찾아서 새벽송을 부르기도 했고, 밤늦게 교회로 돌아와 수다도 떨고 게임도 하며 함께 잠이 든 뒤, 다음날 부스스한 얼굴로 성탄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적 나에게 성탄의 의미란 친구들, 가족들과 함께하는 그저 즐겁고 설레는 휴일 정도였지만, 교회에서 보낼 수 있었던 그 많은 성탄절의 추억들이 쌓여 이제는 진정으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환호하고 기뻐하는 묵상의 시간을 주님께서 허락해주심에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그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성탄의 의미가 앞으로도 내 삶에 더욱더 깊이, 실제적으로 다가오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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