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찾아 한국 왔던 몽골 처녀, 이제 복음 들고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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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찾아 한국 왔던 몽골 처녀, 이제 복음 들고 돌아갑니다”
  • 한현구 기자
  • 승인 2020.05.20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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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총회 역파송 1호 몽골 어르헝 선교사

지난달 예장 백석총회 소속 백석노회 목사 안수식에선 조금 독특한 풍경이 펼쳐졌다. 외모는 한국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지만 긴 이름을 가진 여성이 강단에 올라섰다. 그 주인공은 비지야 어르헝 선교사(47). 몽골에서 우리나라에 와 한국인 학생 사이에서 당당히 3년간의 신학공부를 마치고 사역자의 길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목사 안수식이 마치자 곧바로 선교사 파송식이 이어졌다. 그때 앞으로 나선 인물 역시 어르헝 선교사였다. 이제 어르헝 선교사는 백석총회 소속 1호 역파송 선교사로 고향 몽골에 돌아가 복음을 전한다. 이곳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몽골에 전할 기대로 한껏 부풀어있는 어르헝 선교사를 지난 13일 충북 음성에서 만났다.

 

한국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고향 몽골에서의 사역을 준비하는 어르헝 선교사.
한국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고향 몽골에서의 사역을 준비하는 어르헝 선교사.

 

1%의 확률로 접한 복음

몽골의 기독교인 비율은 1% 안팎에 불과하다. 길을 지나다 마주치는 100명 중 단 1명만이 기독교인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어르헝 선교사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대학생 시절 그 드물다는 몽골 현지 기독교인을 만나 복음을 전해 듣게 된 것이다. 그 길로 교회에 한 번 들렀고 처음 갔던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세상에선 우연이라 말할지 모르지만 어르헝 선교사에겐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곧바로 한국과의 인연도 시작됐다. 잠시 학업을 중단하고 학비를 벌기 위해 한국을 찾았던 것. 그런데 몽골에 비해 기독교인이 훨씬 많고 십자가가 세워지지 않은 동네를 찾기 힘든 한국에서 오히려 신앙심이 옅어졌다. 술을 마시고 노는 세상의 즐거움에 빠져 교회는 점점 잊혀져 갔다.

하루는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고 집에 들어갔는데 같이 살았던 언니가 자느라 문을 열어주지 못했어요. 그래서 옥상에 올라가 술기운에 장난을 치는데 그만 친구와 함께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죠. 그런데 놀랍게도 친구도 저도 어디 하나 다치지 않았어요. 순간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죠.”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교회를 찾았고 이전보다 더 깊이 하나님을 만났다. 놀라운 은혜가 넘쳐나자 고향 몽골에 계신 나이 든 부모님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하루 빨리 몽골에 돌아가 부모님과 형제들,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벅차올랐다.

몽골에 돌아가니 더 큰 은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복음을 접하고 한국에 오기 전 시골에 있는 조카와 동생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돌아가 보니 너무 신실하게 신앙을 지키고 있더군요.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위로가 됐고 커다란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죠.”

 

너는 내 교회를 세워라

다시 돌아온 몽골에선 새로운 생활이 펼쳐졌다. 한국에 간 목적은 학비를 벌기 위해서였지만 돌아가선 오히려 학교에서 일하며 교육 사역에 발을 들였다. 허스오양가 학교를 운영하던 이효영 선교사와 만나면서부터였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학교와 교회 사역도 도왔지만 그때만 해도 전임 사역자로 헌신할 생각은 없었다. 모두가 선교지로 가고 교회에서만 사역하면 누가 사회를 섬기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이효영 선교사도 여러 번 전임 사역을 권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어이 어르헝 선교사를 사역자의 길로 인도해가셨다.

어느 날 기도를 하고 있는데 교회에서 섬기시던 한익권 선교사님으로부터 잠깐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갔더니 A4 용지 두 장을 내미시더군요. 새벽에 저를 위해 기도하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급하게 받아 적었다고 하셨어요. 여러 가지 약속이 있었고 말씀이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너는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말씀이었죠. 제 사명은 선교사이고 사역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해주고 계셨어요.”

계속해서 사회에서 일을 하면서 상담으로의 진로도 꿈꿨던 그였다. 하지만 너는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말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 말씀에 이끌려 선택하게 된 길은 신학공부였다. 이효영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지원서를 넣고 다시 한 번 한국행을 비행기에 올랐다. 이 선교사를 통해 약속의 말씀을 받은 지 8년만이었다.

몽골 학교에서 일할 때 선생님들과 함께한 어르헝 선교사(왼쪽 첫 번째).
몽골 허스오양가 학교에서 일할 때 선생님들과 함께한 어르헝 선교사(왼쪽 첫 번째).

 

이별의 아픔 딛고 더 큰 은혜로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신학공부였다. 하지만 머나먼 타지에서 홀로 공부하는 생활은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나마 익숙한 한국이라곤 해도 가족, 친구 하나 없는 외국이라는 점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가족을 잃는 아픔까지 견뎌야 했다.

사실 한국에 오기 얼마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한국에 왔는데 1학년 때는 큰 오빠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2학년 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한국에 있는 저는 임종을 지킬 수도 없었죠.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어르헝 선교사의 신학공부를 위해 학교를 포함해 주변에서 많은 이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랬기에 두 어깨에 짊어진 책임감 또한 막중했다. 이별의 아픔을 모르는 시간은 야속하게 흘렀고 힘든 와중에도 시험을 치러내야만 했다. 학교에 가는 발걸음은 점차 무거워져 갔다.

너무 슬퍼하고 아파하고 있었던 저를 하나님이 더 깊이 만나주셨어요. 기도회에 가서 서러운 마음에 울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따스한 음성을 들려주셨죠. 제게 부모님과 함께 했던 어렸을 때의 기쁨을 돌려주겠다, ‘이제 너 자신을 위해 울지 말고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구원받아야 할 내 자녀들을 위해 울어주지 않겠느냐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리고 제 슬픔과 어두움을 거둬가 주셨죠.”

그때부터 거짓말처럼 기쁨과 평안이 찾아왔다. 하나님께선 주변 사람을 통해서도 어르헝 선교사를 일으켜주셨다. 같이 공부하던 전도사들과 당시 출석하던 백석대학교회 성도들도 어르헝 선교사가 지쳐 쓰러질 때면 손을 내밀었고 기도의 손을 모아줬다.

큰 오빠의 아들인 조카가 저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됐어요. 큰 오빠는 아들을 목사 만들었다며 저를 많이 핍박했었죠. 그랬던 큰 오빠도 마지막엔 예수님을 영접하고 돌아가셨어요. 1년 뒤 돌아가신 아버지는 먼저 예수님께 가서 기다리겠다고, 제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셨다고 해요.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래도 많은 위로가 됩니다.”

 

몽골의 아픔 치유하고 싶어요

코로나로 하늘 길이 막히면서 뜻밖에 한국에서의 시간을 더 갖게 된 어르헝 선교사. 지금은 충북 음성에서 일자리를 구해 함께 일하는 몽골인 동료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 외국인이 많은 음성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통역하는 일도 그의 몫이다. 색다른 경험이 신선하지만 그래도 어서 고향에 돌아가 고국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몽골하면 우리나라에선 드넓게 펼쳐진 대초원과 별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떠올린다. 하지만 몽골의 내면은 깨어진 가정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청소년들이 일찍 관계를 가지고 아이를 낳아 어린 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아빠 없는 아이들이 많다. 이효영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 학생들도 절반 이상이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이다.

신학공부를 하며 몽골에서 제가 사역하는 대상이 누구여야 하는지 계속 기도했어요. 그러자 하나님께선 꿈속에서 고아들을 많이 보여주셨죠. 육적으로도 고아이지만 영적으로도 고아인 몽골의 청소년들이었어요. 그런 아이들이 꿈을 가지고 하나님 안에서 잘 자라도록 돕고 싶습니다. 또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돌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싶어요.”

당장은 몽골에서 가정사역에 헌신할 계획이지만 어르헝 선교사에게는 또 하나의 꿈이 있다. 바로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가장 극심한 곳 중 하나인 이슬람 지역에서의 선교다. 여성 사역자로서도 쉽지 않은 지역이지만 어르헝 선교사는 두려움보다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기대가 더 크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이슬람 지역 선교사로 떠나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저 평범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저에게 하나님은 끊임없이 선교 사명을 불어넣어 주셨어요. 하나님을 모른 채 상처 입은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고향땅 주민들에게, 그리고 평생 복음을 제대로 들을 기회도 부족한 무슬림들에게 평생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저에게 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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