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전하는 병원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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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전하는 병원이고 싶다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5.06.30 23: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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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은 종합병원 같이, 친절은 동네병원 같이
▲ 좋은 시설과 친절한 진료를 통해 지역 주민들에게 ‘착한 병원’이 되길 소망하고 항상 노력하고 있는 박창영 원장은 교회에서도 안수집사로서 찬양대 대장을 맡아 봉사하고 있으며 해마다 몽골의료선교를 다녀오고 있다.

삼성성인내과의원 박창영 원장

인간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것 중 하나가 의료혜택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좋은 의사 선생님이 가까이 있어 평생 가족처럼 돌봄을 받으며 살 수 있다면 큰 복이다. 최근 메르스 사태를 키웠던 문제처럼, 많은 환자들이 ‘병원 쇼핑’을 다니다가 대형병원까지 가게 되는 이유도, 믿을만한 병원과 의사가 동네에 그리 많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종합병원처럼 좋은 시설에서 동네의원처럼 친절하게 진료해주는 병원이 어디 없을까.

경기도 덕소에 있는 삼성성인내과의원은 이곳에 이사 온 사람들이 제일 많이 추천받는 병원 중 하나다. 이 병원 박창영 원장은 강북삼성병원에서 소화기내과 교수를 역임한 내시경 전문가로 대한위장내시경학회 총무이사, 대한내과학회 학술이사로 활동하고 있어 환자들에게 신뢰감을 준다.

게다가 ‘안수집사’(동신교회:담임목사 김권수)라는 교회 직분이 무색하지 않은 박 원장의 친절한 진료는 이 병원을 찾는 환자들을 만족케 한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이 병원은 늘 환자들이 많아 좀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 목회자들은 무료, 사모에겐 50% 할인 혜택도 있다.

 

“환자 보는 게 즐거워요”

“강북삼성병원 교수를 그만 두고 개원하려고 하자 사람들이 말렸지요. 나이 사십 넘어서 나와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요. 전 자신이 있었어요. 교수할 때에도 환자 보는 게 좋았어요. 친구 소개로 덕소에 오게 됐는데 제겐 이곳이 매력이 있더라고요. 또 대도시보다도 이런 지역에서 미약하나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고요.”

이런 마음은 기독교인의 소명의식과도 닿아있다. ‘시설은 종합병원처럼, 친절은 동네병원처럼’이라는 뜻을 세웠다. 제일 좋은 의료 장비들을 넉넉히 갖췄다. 보통 동네 병원의 경우 내시경 환자가 하루 한명 꼴인 데 비해 이곳은 하루에 10명, 바쁠 때는 40~50명에 이르기 때문이다. 충분한 숫자의 장비로 계속 소독하고 돌려가며 쓸 수 있도록 준비했다.

“처음 환자를 봤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있습니다. 이 분이 어떻게 나를  알아서 여기까지 와서 몸을 내게 맡기나, 그런 감사함이죠. 지금도 그런 감사한 마음으로 환자들을 대합니다. 성격적인 부분도 있을 거예요 교수 시절부터 제가 원래 어깨에 힘이 잘 안 들어가는 스타일이거든요. 환자분들이 그걸 알아주셔서 이렇게 많이 사랑해주시는 것 같아요.”

언젠가 한 아주머니 환자가 박 원장에게 건넨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저는 원장님이 여기 계셔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어느 날 많은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던 대기실에서 어떤 ‘깍두기 머리’ 아저씨가 소란을 피웠다. 오래 기다리는데 불만을 품고 행패를 부린 것이다. 그때 바로 이 아주머니, 벌떡 일어나서 호통을 쳤다. “당신이 뭐냐. 다 기다리고 있는데, 당신이 뭔데 그러냐.” ‘한주먹감도 안 되는’ 이 아주머니의 용기에 ‘깍두기 머리’ 아저씨가 조용히 사라진 일화도 있다.

“아버지가 원래 의사가 되려고 했어요. 실제로 서울대 의과대학에 합격도 하셨고요. 그런데 그때 등록금이 없으셨던 거죠. 당시 친척에게 손 좀 벌리면 되시는데, 그걸 못하셨어요. 그 이야기를 하시는데 제가 의과대학을 안 갈 수 없었습니다. 또 제 적성에도 맞았어요. 저는 다른 걸 했으면 이렇게 잘 못했을 것 같아요. 전 환자 보는 게 늘 즐겁고 재밌어요.”

 

▲ 몽골 선교 당시 전통가옥 게르 앞에서 박창영 원장(왼쪽).

바쁜 시간 쪼개 몽골선교도

부친의 꿈을 이뤄드리려던 이 ‘착한’ 아들 때문에, 그러나 아버지는 두 번 아들 앞에서 속상한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한번은 서울대를 못가고 한양대에 갔을 때이고, 두 번째는 아들이 의과대학을 1년 더 다닐 때였다.

“제가 잡기가 좀 능했거든요. 대학에 들어가서 청바지에 통기타 매고 여기 저기 많이 다녔지요. 서클 활동도 많이 하고요. 그런데다가 제가 운동도 좀 하고, 의과대학도 다니고 하니까 인기도 있었습니다. 여기 저기 엠티가고 놀러가고 하다 보니 졸업정원제에 걸린 겁니다. 1년 더 다니게 됐죠.”

그때 본 아버지의 눈물. 정신이 퍼뜩 났다. 이러다가 “인간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부터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파기 시작했다. 그 후로 장학금 받고 다녔던 학창시절에 평생의 은사가 된 이상종 박사를 만나게 된다.

“제가 인턴일 때에 한 컨퍼런스에서 에이즈에 대해서 열심히 준비해서 발표를 했어요. 다 끝났는데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뒤에 구름 떼 같이 인턴, 스텝들을 끌고 제게 오시는 거예요. 그 장면이 상상이 되시죠. 그 권위가 엄청난 교수님이 저 같은 인턴 나부랭이 앞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박 선생, 레지던트 무슨 과를 정할 것인가?’”

당연히 내과였다. 그때만 해도 내과가 제일 인기가 있었고 그래서 힘들었다. ‘청진기 안 쓰는 의사가 의사냐’, 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VIP 병원으로 유명했던 고려병원(강북삼성병원 전신) 내과의 최고 권위자인 이상종 박사의 부름은 그에겐 영광 그 자체였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이 은총’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렇게 의사가 되어 평생 우러러 볼 수 있는 스승을 만날 수 있었던 것, 덕소에 개원해서 이처럼 많은 사랑을 받게 된 것 모두가 하나님의 은총이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다. 그는 매년 몽골에 의료선교를 간다. 이번에 가면 9년째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환자들이 많아 토요일까지도 바쁘게 근무하는 그가 겨우 누리는 금쪽같은 휴가 일주일, 거기서 3박 4일을 뚝 떼어 의료선교에 쓴다.

 

▲ 황해도에서 처음 믿음을 받아들였던 할아버지부터 아버지, 그리고 사촌 친척들 모두 믿음의 가문에서 자란 박 원장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감사하다고 한다.

믿음의 가문이 받는 복

“그전엔 베트남 의료선교를 갔었는데요, 거긴 지속성이 어렵더라고요. 몽골은 매년 울란바토르에서 차로 세 시간 정도 더 들어가는 테를찌로 갑니다. 해마다 같은 곳을 가니까 이제 얼굴도 익고 열매도 많습니다. 교회 청년들과 같이 가서 그곳 아이들을 가르치고 진료를 해주는데, 나중에 보면, 저희가 나눠준 티를 입고 교회 가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고 하더군요. 너무 보람된 일이죠. 저희가 며칠 진료하지만 그걸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까요.”

하나님께선 이런 박 원장에게 최근 기쁜 소식을 주셨다. 큰 딸이 미국의 명문 ‘다트무스대학(Dartmouth College)’을 이번에 졸업한데 이어 둘째 딸이 ‘윌리엄스대학(Williams College)’에 들어갔다. 이곳을 나오면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은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명문으로 알려졌다.

벌써부터 “아이들 시집갈 때 확실히 울 것 같다”는 확실한 ‘딸 바보’인 그에게 이보다 더 기쁘고 감사한 일은 없다. 이 모든 게 다 담임목사님과 부모님(박경대 장로, 최영희 권사),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기도를 많이 해주신 덕분이라고 공을 돌린다.

“저희 할아버지가 황해도에서 처음 믿음을 받아들였던 세대시고요, 할아버지의 형은 중국 최초 선교사로 가셨다가 순교하셨습니다. 장신대 학장까지 지냈던 박창환 목사님이 사촌 형님이시고요. 저희 집안은 다 기독교 집안이에요. 믿음의 뿌리가 있어서 그런지, 대체적으로 모든 자손들이 잘 살고 있습니다.”

지난 1월 4일, 박 원장은 목사님과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과 지인들을 모시고 개원 1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가슴 먹먹한 감사와 기쁨이 병원에 울려 퍼졌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는 말씀을 가훈으로 평생 살아온 아버지의 신앙이 아들에게 아름답게 전수되어 선한 열매를 맺어가는 것을 모두가 축복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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