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 안 사람들’의 슬픈 과거 탈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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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 안 사람들’의 슬픈 과거 탈출기
  • 송영락
  • 승인 2005.10.21 1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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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구치소, 국내 최초 재소자 독서발표회




“어머니 앞에서는 모든 아들들이 어린 마음이 되게 마련인가 봅니다. 내 나이 벌써 쉰 하고도 넷이 되었지만 지난해 자식의 결혼 날짜를 잡아두고 나흘 전 구속이 되어 첫 아들의 결혼을 보지 못한 아버지의 입장과 부모를 증인으로 세워 백년가약을 같이 했어야 할 아들의 입장이 선연히 가슴에 차오르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두고두고 천추의 한이 될 것 같은 용서받지 못할 가족의 가장으로써 비극의 복판에 이 책을 읽어가며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어서 감사하고 생각하는 겸허함을 배우려 합니다.”


아름다운 글 모음집 ‘인생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소감문 및 독후감 발표회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한 김억만씨의 소감문이다.


지난 20일 수원구치소(소장:김태희 사진) 기독교분과위원회(위원장:최광용목사)가 국내 최초로 재소자 독서 발표회를 가졌다. 김태희 소장과 기독교분과위원회가 가족, 우정, 사랑, 인생, 지혜의 소중함을 소개한 아름다운 글을 모아 ‘글모음 집’을 출간하여 독서 발표회를 가진 것이다.


150여 편의 소감문과 감상문을 제출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과 기대 속에 진행된 독후감 발표회는 초등학교 시절의 아련한 추억으로 안내했다. 재소자들은 콧물 흘리면서 낭랑한 목소리로 발표했던 초등학생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 자리에 앉아 있었던 재소자들도 초등학교 시절엔 대통령, 장군, 사업가가 되겠다는 희망찬 꿈만 꾸었었다. 


공정한 엄선 과정을 거쳐 당선된 12편의 감상문은 이렇게 재소자들의 마음을 아련한 추억으로 인도했다. 


한 편 한 편 발표 할 때마다 재소자들은 빚진 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보면서 슬픈 과거의 시간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감추는 재소자. 먼 허공을 쳐다보며 과거의 사건에서 벗어나고 싶은 세미한 몸부림을 그대로 보여줬다. 


담 안 사람이라 세상의 세파에 찌들어 거칠 것이라는 선입견은 일순간에 사라졌다. 난생 처음 방문한 구치소. 구치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독후감 발표회 심사위원, 이 모두가 낮선 그림들이었다.


그러나 2시간 동안 진행되는 발표회는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사람의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순간의 잘못 때문에 지금은 잠시 속박의 몸이 되었지만 그날 만난 재소자들은 철장을 벗어나 있었다.


“처절하리만치 온몸과 마음을 옭아매었던 포승줄의 치욕스러움도  그날은 한낱 제도권의 불편한 도구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몇 분간의 짧은 거리를 이동하면서 지난 165일간의 짧지 않았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갔습니다.”


김석원씨의 감상문은 이렇게 시작됐다. “어머니 예순 다섯…, 자식 내외가 바쁘다며 명절에 고향에 못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동네 사람들에게 아들이 바빠서 아침 일찍 올라갔다며 당신 평생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나는 밤새 눈시울을 붉혀야 했습니다. 다음날 나는 새로운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지금의 부끄러운 나의 모습을 거울삼아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준비하는 시금석을 마련해야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며 아름다운 글 모음집에서 받았던 깊은 감동을 기록해 나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글의 힘은 컸다. 아무 치장 없이 전달되는 감상문은 읽는 이와 듣는 이 모두 한마음으로 묶어 줬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훌쩍거리는 눈물 소리는 금방 조그마한 강당을 가득 메웠다. 눈물은 깊은 상처를 치유해준다고 했던가. 이들은 눈물로 자신의 아픔과 읽는 이의 아픔을 함께 나눴다.


그리운 어머니. 그 어머니의 품속은 어떤 큰 잘못도 용서한다. 어머니의 품속은 과거의 아픈 상처에만 얽매이지 말고 내일을 준비하라고 용서한다.


담 안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미소와 온화한 얼굴로 재소자들은 점점 바뀌고 있었다. 1시간. 지루하지 않은 시간은 이렇게 재소자들의 마음을 조금씩 부드럽게 가꾸어가고 있었다. 어떤 드라마도 영화도 흉내 낼 수 없었다.


대본 없는 드라마는 계속 진행됐다. 김명숙씨. 청아한 목소리는 자식을 기르는 어머니의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저는 수원구치소에 구금되어 어언 11개월을 보내는 동안 사랑하는 딸들이 세상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아름다운 소녀로 자라서 지금은 엄마를 기다리는 해바라기처럼 햇살이 눈부시게 자라고 있습니다. 꿈속에서 목이 쉬도록 불러보는 나의 딸들…. 미안하구나 미안하다는 말밖에 못하는 이 자리에서 자식을 안아보고 싶고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어머니의 입장이 되어서 사랑과 희망을 전해주는 사랑하는 남편과 딸들이 있기에 더욱더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며 진심으로 생각이 기쁨되게 노력하겠습니다.”    ▶교도소 안에 그림 전시장을 설치해 놓고 있다.

자신의 처지를 과감없이 보여준 독서감상문은 이렇게 2시간 동안 진행됐다. 국내 최초로 시도한 재소자 독후감 발표회. 어느 구치소에도 흉내 낼 수 없는 시도였다.

수원구치소 기독교분과 위원회는 최우수상과 우수상, 장려상을 수상한 재소자들에게 작은 상과 마음을 전달했다. 이런 작은 사랑은 재소자의 마음이 긍정적으로 바뀌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이런 결과는 당연한 것이었다. 수원구치소는 L, R, P운동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사랑(Love), 존중(Respect), 열정(Passion)의 영문 첫 글자를 인용한 것으로 그 배경에는 인간 존중, 더불어 살아가는 환경, 적극적 삶이 담겨져 있다.


김태희소장은 “우리나라 교도소도 이젠 웰빙과 문화와 교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교도소로 거듭나야 한다”며 “음악, 글쓰기, 그림을 통해 교도소가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생각을 불어 넣고 싶다”고 말했다.


또 김소장은 “희망과 현실의 차이가 가슴을 조여 오고, 힘들고 지루한 수용 생활이 연속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희망이란 내 자신이 가꾸고 지켜갈 때 풍성해지는 평범한 원리를 생각해 본다”며 인생은 관점의 차이에 따라 주어진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고 언급했다.


최광용목사는 “과거라는 고정된 틀에 얽매여서 스스로에게 무거운 짐을 주며 살아가는 비판적 삶이 아닌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준비하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된 삶을 설계하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도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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