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사순절, 신앙의 본질 회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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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사순절, 신앙의 본질 회복해야
  • 이석훈
  • 승인 2005.03.0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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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종교개혁과 사순절(1) (2) (3) - 주도홍교수
 

종교개혁과 사순절 (1)

 

루터와 칼뱅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 입각하여 중세교회의 잘못된 교회 절기들을 개혁하고 정리했다. 곧, 16세기 종교개혁과 함께 교회력에 대한 결정적, 전환적 이해가 이뤄졌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교회 절기에 대한 바른 이해는 교회사적으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이해를 근거로 함이 타당하다. 쉽게 말해서 종교개혁자들이 사순절을 어떻게 이해하고 중세교회와 어떤 차별성을 보였으며, 어떻게 새롭게 행동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또 다시 무분별한 종교 의식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잘못된 경건으로 성도들을 호도하게 된다. 잘못된 교회의식은 결국 중세교회가 범했던 것처럼 신앙의 본질적인 것을 몰아내고 비본질적인 것을 강조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강조란 성경을 떠난 비 진리에 빠져드는 미신적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

중세교회가 범했던 행위구원이란 이러한 의식의 강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전환적 결단은 중세교회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전제로 했다. 


   먼저 종교개혁 이전의 사순절에 대한 이해를 살펴본다. 계산에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부활절 전 40일 동안을 사순절이라 부르는데, 이 기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며 기도, 금식, 참회 그리고 사랑의 섬김을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기기를 노력했다.

보편적으로 금식에 대한 기록은 디다케에 의하면, 일주일 중 수요일과 금요일에 정규적으로 이뤄졌다. 이레내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첫 3세기 동안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부활을 준비하는 대략 2-3일 동안 금식을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4세기에 이르러 금요일만을 금식의 날로 지켰다. 그러던 중 사순절은 중세교회로 넘어오면서 주로 금욕적 행위인 금식과 밀접한 관계가 맺어졌다. 초대교회에서 며칠간의 금식은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권해졌는데, 40일 동안의 금식은 분명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40이라는 수는 구약에 나오는 모세와 엘리야, 게다가 예수님의 광야 40일의 금식에서 아이디어를 가져 온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40일에 대한 계산은 차이를 보였다.

동방교회는 7주 동안 성 토요일을 뺀 몇몇 토요일과 주일을 제외한 36일을 실질적 금식의 날로 지켰으며, 서방교회는 6주 동안 주일만을 뺀 36일을 금식의 날로 지켰다. 그렇지만, 독특하게도 예루살렘교회는 40일 중 5일 동안만을 금식의 날로 지켰고,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규례로서의 금식은 초기에는 엄격하게 지켜졌는데, 그렇다고 전혀 음식을 먹지 않는 단식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저녁에 하루에 한 끼를 먹을 수 있었으나, 육류, 물고기, 게다가 대부분의 지역에서 계란과 또는 우유제품까지도 먹는 것을 강하게 금하였다.

그러다가 9세기 경부터 서방교회에서 조금은 융통성을 갖게 되는데, 13세기에는 저녁 미사를 책임지는 자에게 한 잔의 음료와 가벼운 식사가 허용되고, 15세기에 들어와서는 오후 3시경부터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고, 결국 정오부터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물고기와 치즈 등 우유제품도 어느 순간 중세교회는 먹을 수 있도록 점차 허용하였다.

그러던 중, 1966년 로마교회는 새롭게 교회법을 만들었는데, 사순절의 첫 날과 성 금요일에만 금식을 의무화 하였다. 그럼에도 동방교회에서는 지금도 엄격하게 육류, 물고기, 계란, 우유제품까지도 사순절 기간 동안 먹는 것을 금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로마교회에서는 사순절이 갖는 참회의 성격을 의식에 반영하여 보라색의 가운을 입는다거나, 미사 중에 ‘할렐루야’와 ‘영광 송’등을 금한다. 미사 중 택하는 성경 본문 역시 이러한 참회의 성격을 반영하여 선택한다.

결국 사순절 동안 축제를 금하게 되고, 선행과 경건훈련으로 지내게 된다. 그렇지만, 최근에 와서 육체적 금식과 금욕적 행위 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이웃에 대한 선행과 경건훈련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럼 이런 사순절에 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어떤 입장을 보였을까? 다른 말로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떻게 사순절에 대하여 입장을 가져야 할까? 사순절이 우리의 신앙생활과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 다시금 중세교회의 입장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성경이 말하는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4:10-11)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물론 성경은 예수님의 40일 동안의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한” 금식을(눅4:2),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을” 목적으로 하는 금식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을(마6:18), “신랑을 빼앗길 날”의 금식을(막2:20) 언급한다. 게다가 안디옥 교회의 바울과 바나바 선교사 파송을 위한 은혜로운 금식(행13:2-3)이 제시된다.

그러니까 금식 자체를 반대하거나 비판하지 않음을 본다. 그렇지만, 중세교회가 강조하였던 사순절의 그 절기와 금욕주의적 금식, 규례에 대한 강조가 어떻게 성경과 상관관계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물음이다.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만을 남기고 그 외 교회의 모든 절기를 폐지하였던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을 들어보도록 할 것이다. 모든 의식과 율법의 굴레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금식과 모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요구할 뿐이다(루터).   


종교개혁과 사순절 (2)

   천 년의 중세가 깊어갈수록 크리스천은 항상 진지해야 했고, 조금은 우울해야 했으며, 웃음이 사라진 심각한 표정으로 일상에 임할 때 경건한 성도로 받아들여졌다. 명랑과 웃음 그리고 유머는 경건한 크리스천이 피해야 할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동물과 구분하는 인간의 특성인 웃음을 중세는 나약한 육체의 불 경건으로 여겼다. 20세기 말 ‘장미의 이름’으로 영화화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도 웃음을 죄악시했던 중세 수도원의 어두운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세교회의 가장 유명한 인물이기도 한 성 버나드 역시 죽어간 친구의 특별한 공덕으로 웃지 않았던 그의 진지함을 들추었다. 곧 금욕주의로 일생을 살아갔던 수도원적 삶이 중세가 가장 추구했던 삶의 모델이었다.


   중세의 베스트셀러는 인간의 비극과 죽음을 그린 작품들이었다. 중세의 중요한 종교서적의 한 장르는 ‘죽음의 기술(Ars moriendi)’이었다. 게다가 이 세상을 경멸하는 문헌들이 가득하였다. 12세기 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쓴 『인간 존재의 비참함에 대하여』는 “인간은 ... 구역질 일으키는 정자로 만들어졌다. 육체의 정욕, 쾌락의 불꽃 그리고 더욱 천박한 것 곧 죄의 수렁 속에서 태어난다.
두려움과 고통 그리고 더욱 비참한 것 곧 죽음을 위해서 태어난다.”(호르스트 푸어만)고 말한다. 인생은 “고통의 골짜기”를 지나는 것이니, 출생이란 영혼이 죄 많은 육체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인간존재의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세상으로의 출생을 알리는 생일은 의미 없는 것이며,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했다.
중세 말에야 생일잔치가 조심스럽게 살아났지만, 이전에는 생일보다는 사망일이 기억되었다. 왜 그랬을까? 무엇보다도 ‘신앙의 시대’였던 중세를 행위구원의 구도적 신학이 주도하였기 때문이었다. 곧 잘못된 구원관이 그 구원을 어떻게든 얻으려는 인간들을 더더욱 비탄의 골짜기로 생을 유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삶에 반기를 든 자들이 루터, 쯔빙글리 그리고 칼뱅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이었다. 그들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란 놀라운 축복이며, 죽음을 이긴 영생의 삶이며, 천국의 맛보기로 곧 ‘이미’의 천국을 확신하였다.
곧 감사와 행복, 자유와 사랑, 즐거움과 찬송이 가득한 삶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우울한 수도원적 금욕주의를 생의 모델로, 구원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모시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생활이 성경이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루터는 금식 그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성도의 경건훈련에 도움이 되는 하나의 수단으로 금식을 추천하였다. 그렇지만, 문제는 금식을 바리새인들처럼 규범화하여, 예수님이 자유하게 하신 율법으로 다시금 돌아가게 하는 의식적 규례를 거절하였다.
루터는 자신의 수도원적 시절의 경험을 근거로 금식이 결코 성욕을 떨어뜨리지 않고, 도리어 증가시킴도 고백하면서, 차라리 풍족한 식사가 신학적 의심과 영적 유혹을 이기는 수단이 된다고 추천하기도 하였다. 상당한 사람에게는 금식이 육체의 욕망을 감소시키는 수단이 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이에게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 루터는 모세의 율법에서처럼 며칠간의 금식기간을 정하는 일은 잘못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감사와 사랑의 순종은 루터가 원하는 바였다.

   1522년 쮜리히에서 시작된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은, 면죄부 문제를 부각시킨 루터와는 다르게, 금식의 기간에 공개적으로 몇몇 성도들이 소시지를 먹어버린 일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교회가 규례로 정하여 금식을 지키고 있을 때, 쯔빙글리는 의도된 행동으로 교회의 잘못된 권위를 대적하여 육류를 먹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든 음식을 정결하게 하였기에, 교회법이 이러한 성도의 자유를 제한 것은 잘못임을 선언하고자 하였다. 물론 쯔빙글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듭난 성도의 자유를 언급하려고 했던 것이지, 금식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뜻은 아니었다.

   제네바의 칼뱅은 어떤 입장이었을까? 루터보다 한 세대 후에 태어난 칼뱅은 일단 루터와 쯔빙글리의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다. 더 이상 규범화 된 절기의 금식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두 가지 목적으로 보다 긍정적으로 금식을 제시한다. 육의 극복, 기도와 경건한 묵상을 향한 영의 준비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를 통한 자아부인의 표현으로 금식을 이해한다. 육의 극복은 개인의 영역에서 활용될 수 있으나, 나중 두 가지는 사적으로 또는 공적으로 제시될 수 있다.
금식을 함으로서 우리의 영이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 국가적으로 공적으로 재난을 만났을 때 성도들은 함께 금식하며 기도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금식 자체를 중세교회처럼 규범화하는 일은 미신이라고 칼뱅은 단호히 거부한다.
어쨌든 금식에 대한 이러한 칼뱅의 적극적 태도는 16, 17세기 개혁교회 역사에서 볼 때, 위기를 당한 영국과 스코트랜드 그리고 스위스 개혁교회가 공개적으로 금식의 날을 선포하며 기도하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금식은 고행주의의 목적으로 행함이 아니고 기도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에 금식이란 말이 기도란 말과 동반되지 않은 구절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언중에 기도 행위를 수반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박윤선)


 


 





종교개혁과 사순절 (3)


 



“사순절이 뭐지? 고등부 학생에게 사순절에 대해 묻자 어릴 때부터 교회에 출석한 학생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부활절 전에… 사 주?’라고 얼버무린다. 아동부를 거쳐 중등부, 고등부까지 10여 년을 교회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이 학생조차 사순절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부분의 교회들이 사순절에 대해 별다른 교육을 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인터넷 사이트의 인용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올까? 사실, 사순절은 성경에 나오는 말이 아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오순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한국말 사순절로 일컬어지지 않았는지 생각하게 되는데, 후기 교회가 어느 순간 제정한 말이라 하겠다. 언제 사순절이 교회의 절기로 등장하였는지에 대해서도 불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지역과 시대, 교회에 따른 다양한 계산법, 규례 그리고 상이한 이해가 보여주듯이 역사적 자리매김이 쉽지 않다. 어렴풋이 일컬어지는 최초의 근거로는 325년 니케아 공회의 제5법령집인데, 여기에서 처음으로 40일이라는 의미인 그리스어 ‘테살라코스테’가 등장하는데, 예수님의 40일 금식과 상관되는 것으로 예수님의 고난의 40일을 기억하는 사순절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물론 모세, 엘리야의 40일 금식도 사순절을 소개하면서 등장하는데, 엄격하게 볼 때 사순절과는 내용적 상관이 없다 하겠다. 4세기에 이르러 예루살렘 교회에서, 그리고 7세기에 이르러서 서방의 라틴교회가 교회적으로 지내기 시작했다.
현대에 이르러 사순절에 대한 교회적 규례도 전혀 일치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현재 루터교회의 교회력에 등장하고 있으나, 성공회 정도가 엄격히 지키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볼 때에도 사순절에 대한 강조는 현대에서 매우 부분적으로 이뤄지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사순절은 교회사적으로 그 의미를 찾고 정리를 하기에는 단순하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고난절 기간에 가톨릭교회가 우세한 필리핀과 남미 등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종종 특이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자원한 특정인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에 매달려 극한 고통을 체험하는 장면이다.
채찍을 맞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손과 발에는 대못을 망치로 박으면서 피 흘리는 잔인한 고통을 스스로 당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한 마디로 말해서 고난당하신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도 함께 고통을 당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럴 듯 하다. 과연 그럴까? 분명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당하신 대속의 십자가를 그런 식으로 이해해도 되는 것일까? 과연 우리 스스로를 위한 고통이 죄인인 나를 죄악의 고통에서 뭔가 조금이라도 구원하며,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지? 생소한 비성경적 이해임이 틀림없다.

   중세교회가 내세운 사순절의 동기도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이와 다르지 않다. 사순절이 중세교회의 전통에서 어느 순간 엄격하게 지켜진 이유는 신학적으로는 행위구원의 신학이 배경으로 되어 있었다.
성자 메시야의 십자가의 수난을 바라보면서 죄인인 우리가 마땅히 그 뭔가를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었다. 곧 여기에서 교회사적으로 소위 일컫는 ‘수난의 영성(Passionsfroemmigkeit)’이 등장하였다.
결국 수난의 영성은 한정적으로 고난의 절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중세 사람들의 전 일생을 결정적으로 이끌고 규명하는 경건의 원리가 되기도 했다. 가장 예수 잘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실천하고, 기억하는 ‘늘 심각한 사람’, 자신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가장 농도 깊게 체험하는 사람으로 오해했다. 중세교회를 지배하였던 수도원운동의 영성의 근저에는 비뚤어진 이러한 수난의 영성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한 마디로 금욕주의가 중세교회의 중요한 삶의 원리, 구원의 수단이었다. 물론 ‘오직 믿음’을 외쳤던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수도원의 영성을 인정할 수 없었다. 곧 잘못된 행위구원론을 부정하며, 수도원운동에 대한 종결을 선언하게 되었고, 결국 이로써 개신교에서 수도원운동은 추방되었다.


   결론으로, 중세적 교회절기인 사순절은 교회가 그 지킴을 규례화, 제도화, 공식화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 등과 같은 교회절기로 지키기에는 부적절하다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성경적, 교회사적 근거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대의 교회가 너무 세속화되어 마땅히 기억해야 할 구속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잊어버림은 잘못이다. 십자가 없는 축복만을 외침은 기복주의이다.
또한 무분별한 쾌락과 방종의 삶으로 빠짐은 죄악이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땅히 기억하며 감사하고 구원받은 성도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듭난 생애,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곧 이 기간을 개인의 경건을 위한 기회로 삼을 수 있도록 교회는 각자의 재량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죄인들이 마땅히 져야 할 그 십자가를 기억하며, 말씀의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생활화하며, 서로간의 잘못을 참회하며, 화해를 도모하며, 말과 행실에 있어서 절제하며, 우리 주님이 늘 그러하셨던 것처럼 어려움과 고난에 처한 이웃을 보다 적극적으로 돌보는 사랑실천에 나서는 삶을 힘씀이 바람직하다.
사실 이러한 성도의 삶은 제한된 특정 기간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생애가 그렇게 되어야 함이 바람직하다. 이는 마치 안식일만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모든 날이 성도들에게는 거룩한 날인 것처럼 말이다. <끝>

         



 

주도홍교수(천안대학교,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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