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 복음 사역을 이어갈 나라는 조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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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 복음 사역을 이어갈 나라는 조선입니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4.04.30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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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⑩ 길 위의 개척자 ‘아서 가너 웰본’

1903년 이제 갓 태어난 첫 아들 토마스를 열흘 만에 잃었다. 1914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 앨리스를 양화진에 묻었다. 한창 예쁜 3살이었다. 

아서 가너 웰본(Arthur Garner Welbon 1866~1928) 선교사는 장티푸스로 딸이 호흡이 잦아들 때 오지에서 복음을 전하다 부고를 들어야 했다. 복음을 위해 불꽃 같이 살았지만, 다른 선교사들처럼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은 찾아왔다. 차갑게 식어버린 어린 딸을 서울 양화진으로 데려올 때 아비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애가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에도 사명을 붙들고 하나님께 순종했다. 

엄마 새디 누스 웰본(Sadie Nourse Welbon 1872~1925)은 일기장에 “작은 영혼은 어린 하얀 양처럼 엄마를 보며 서서히 이 땅을 떠나갔다. 엘리스는 이 세상에 보내주신 예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갔다”라고 적어야했다.  

걷고 또 걸으며 복음전파
미국 미시건주 이스트맨빌에서 출생한 아서 웰본 선교사는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 북장로교 파송을 받아 1900년 조선에 도착했다. 한해 앞서 입국해 간호선교사로 사역하던 사라 누스와는 1901년 결혼했고, 사라는 결혼 후 새디라 불렸다.

오지 선교의 개척자로 불리는 웰본 부부는 처음부터 개척정신이 강했던 듯하다. 대다수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서울 정동이 아니라 외곽 인성부재에 살며 신분을 막론하고 복음을 전했다. 웰본은 서울 북부뿐 아니라 황해도 배천, 강원도 철원, 원주 등 오지를 다니며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1903년 당시 웰본 선교사는 “제가 맡은 배천과 강원, 60여개 도시와 마을을 두 번 순회하며 거의 모든 곳을 방문했다. 5차례 전도여행을 하며 평균 1,000리를 걸었고, 총 124일 걸렸다”고 선교부에 보고했다. 불과 입국한지 3년에 불과한 파란 눈의 이방인은 하루 40~60리를 걸었던 것이다.

백석대 이상규 석좌교수는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웰본은 부지런히 다니고 상당한 거리를 이동했다. 그토록 열심히 사역했기 때문에 초기 1년에 500명 신자가 불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웰본 선교사에 의해 일어난 황해도 배천의 부흥운동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1903년 하디 선교사의 원산대부흥운동이 불씨가 된 것으로 흔히 알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 약 1년 앞서 황해도에서 배천대부흥운동이 일어났고, 원산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안동에서 폭발적 부흥 일어
1909년 웰본 부부는 안동선교부로 파견됐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정적이었던 만큼 복음의 열매는 대단했다. 유교문화의 본산이라는 안동에서 복음을 전할 때마다 성령께서 도우셨다. 1910년 웰본은 선교보고서에 “안동에만 56개 모임이 생겼고, 2,500명이 정기적으로 출석하고 있으며, 단위별 성경공부에 수천 명이 참석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철학을 공부했던 웰본은 안동 양반들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할 능력이 있었다. 장날이 되면 장터에서도 쪽복음도 나눠주었다. 새디는 젊은 여인들을 위한 ‘색시반’과 중년 ‘부인반’ 성경공부 모임을 운영했다. 남녀가 내외하는 문화 때문에, 부부가 사역을 분담하는 것은 더욱 의미가 있었다. 

웰본과 새디에게 성경교육을 받은 주민들은 전도자로 세워져 각 지역으로 파송되기도 했다. 특히 웰본은 세례자 교육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고, 엄격한 문답과정을 거쳐야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가르쳤다. 

웰본은 안동에서만 사역하지 않았다. 백두대간을 따라 산간오지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특히 경상북도 상주, 영주, 봉화, 풍기, 예천 등에 교회를 개척했다.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것 같은 여정에도 복음 들고 산을 넘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웰본은 환등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사진이나 그림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며 전도했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1910년 안동에서만 121명이던 신자는 1915년 1,121명, 1921년에는 6천명 이상으로 부흥했다. 

1909년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아서 웰본과 새디 웰본 선교사 부부와 자녀들 사진. 부부는 1903년과 1914년 두 자녀를 양화진에 묻어야 했다. 

3.1운동 당시 일제만행 폭로
“한 여자아이가 태극기를 게양하자 일경이 칼로 아이의 두 손을 자른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수많은 잔악행위 중 하나일 뿐이다. 서울에서 30마일 떨어진 교회에 불을 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웰본이 미국에서 현지 신문에 쓴 기고 내용이다. 평양선교부로 사역지를 옮긴 웰본은 3.1 만세운동을 직접 지켜보고 경험했다. 그는 기꺼이 일제의 폭압을 기록하고 증언했다. 추방을 각오해야 했지만, 실명으로 분노했다. 아내 새디가 건강이 악화되면서 1919년 귀국했지만, 미국에서도 진실을 알리고자 애썼다.

웰본의 정의는 자손에게도 이어졌을까.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 웰본의 손녀 에비 여사는 특별한 사료를 100주년기념교회에 기증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15세였던 아들 헨리 웰본이 평양외국인학교 부근에서 주웠던 독립신문이다. 헨리는 목회자로 미 군정청에서 일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독립신문은 1919년 상해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과는 다른 것이었지만, 신문에는 독립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에비 여사는 2017년 흑백사진 등 소장품 648점 기증해, 일제가 훼손한 경희궁 회상전의 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1922년 웰본은 아내와 가족을 미국에 남겨두고 홀로 돌아와 대구와 안동선교부에서 사역을 이어갔다. 안타깝게도 새디는 1925년 7월 테네시주 메리빌에서 주님 품에 안겼다. 웰본 선교사는 대구에서 사역하던 중 1928년 과로로 인한 장티푸스로 별세했다. 그는 아들 토마스와  딸 앨리스가 안장되어 있는 양화진에 함께 묻혔다. 

웰본은 28년 동안 조선에서 사역하며 약 70만명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는 조선 사람의 갖고 있는 무언가를 봤던 듯하다. 1908년 웰본은 국내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동양에서 복음 사역을 이어나갈 나라는 조선입니다. 조선 사람들은 충성스럽고 강직합니다. 강력한 조선인 설교자들이 나타나 동양에서 복음 전파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뤄낼 것입니다. 저는 조선을 통해 동양이 기독교화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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