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 인물 : 김창식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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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인물 : 김창식목사
  • 승인 2004.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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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48개 개척한 ‘조선의 바울’

탐관오리의 학정을 견뎠던 김창식은, 1894년 벌어진 청일전쟁으로 또 한번 어려움을 겪었다. 의료선교사 제임스 홀의 조수로 일하던 그는, 청일전쟁 격화로 미국선교부가 서울로 철수한 가운데서도 평양에 남아 부상자와 상처받은 사람들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청나라를 이긴 일본의 조선점령이 시작된 그 당시, 김창식은 격변의 현장에서 사역을 감당함으로 영적인 힘을 기를 수 있었다. 성경이 말하는 연단의 고비고비를 넘긴 것이다. 그는 홀로 교회를 개척할 만큼 이미 성숙해 있었다. 이를 인정한 감리교 선교부는 1901년 5월9일 상동교회에서 모인 선교회에서 김기범과 함께 최초로 목사안수를 부여했다. 이것은 감리교 뿐아니라 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목사안수를 이룬 사건이다. 장로교는 이로부터 7년 후 길선주 외 6명에게 안수했다.

목사안수를 받아 이제 김창식목사로 사역하게 된 그는, ‘선교사들의 조수’에서 ‘동역자’라는 격상된 신분으로 사역을 감당했다. 영변구역장, 평양서지방 감리사, 영변지방은 평양서지방보다 4배나 큰 지역으로, 대부분 산악지대여서 한번의 순행으로 1,720리를 다녀야 했던 곳이었다. 모터가 달린 자전거를 타고 다녔던 외국선교사와 달리 그는 이 넓은 곳을 1년에 2-3번이나 그것도 걸어서 다녔다고 전해진다. 얼마나 큰 헌신이란 말인가.

김창식목사는 일생동안 48개 교회를 개척했으며 125곳의 교회를 맡아 일했다고 전해진다. 해주에서 사역하던 어느 날,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고혈압으로 쓰러져 7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가 1929년 1월9일 그의 나이 72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이루어진 그의 교회개척과 돌봄, 그리고 영변지방을 관리한 그의 모습 속에서 교회사가들은 바울의 행적과 거의 흡사하다고 밝힌다. 그래서 김창식목사는 흔히 한국감리교회가 낳은 ‘조선의 바울’로 비유되곤 한다.

윤영호기자(yyh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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