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토론 - ‘양심적 병역 거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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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토론 - ‘양심적 병역 거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승인 2004.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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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최근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이에 대한 찬반 여론이 고조되고 있다. 이를 찬성하는 쪽에서는 ‘대체 복무제’ 등의 적극적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형평성, 병역 기피 등을 이유로 적극 맞서고 있다. 이에 대한 교계의 여론을 들어보았다.

여호와의 증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찬성-정종훈교수 / 연세대연합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양심의 자유는 절대적인 권리로서 그 누구도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저지받거나, 양심에 반해 행동하도록 강제될 수 없다. 양심의 문제는 다수결로 결정지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양심의 자유는 그 어떠한 자유보다도 본질적인 자유이며, 국가의 존재보다 근원적인 자유이다. 양심의 자유는 오직 다른 사람들의 양심의 자유 앞에서 한계를 갖는데, 다른 사람의 양심의 자유를 무시하거나 제한하는 양심은 폭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적 질서를 수호하는 나라에서 양심은 최소한도로 보장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보장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양심의 자유가 상대적 자유로 분류되면 자유의 방향으로 적용되기보다 국가 안전 보장의 명분 아래 유보되는 방향으로 적용되기 쉽다. 그러므로 양심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은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나 평화운동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양심을 국가 권력 앞에서 보호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국방의 의무를 운운하며 양심적 병역 거부를 반대하지만, 국방의 의무는 전 국민의 현역 집총 복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재 우리나라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는 연간 6백 명 내외로 현역 집총 복무자의 숫자를 위협하지 않는다. 또한 급격하게 늘어날 것이라 전망되지도 않는다. 대개 현역 복무자들은 자기 발로 찾아가 명확하게 의사 표명을 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로 인해서 위화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공익근무나 병역 면제의 판정에서 제기되는 비리 가능성으로 인해서 위화감을 갖는다.

우리 사회 병역 기피의 현상은 병역 비리를 척결하고 징병관의 판단을 객관화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지,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처벌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양심적 병역 거부를 대책없이 반대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한 대체 복무제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시급하다.

기독교적인 인간관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예외없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다. 인간은 자신의 인권을 누리기 위해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인권의 부정이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부정이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신 하나님에 대한 부정이다. 이러한 인권은 일단 부정되면, 부정당하는 자의 인권뿐만 아니라 부정하는 자의 인권도 위태롭게 한다.

기독교가 여호와의 증인을 이단 종교라고 규정했다고 해서,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의 인권을 무시할 수는 없다. 유엔 인권위원회와 유럽의회 그리고 적지 않은 국가들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는 이미 국제법적 인권으로 승인받고 있다. 물론 대체 복무제가 미끼가 되어 이단 종교인 여호와의 증인으로 개종하는 젊은이들이 나올 수 있지만, 이를 막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선교적인 과제이지 국가 권력의 힘을 빌릴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단의 양심도 존중받아야 할 양심이며, 이단의 인권도 보증받아야 할 인권임을 인정해야 한다.

대개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평화주의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들은 폭력적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력 행위를 연습하기보다는 그들과 상대 모두를 보호할 수 있는 비폭력의 훈련을 통해서 폭력의 악순환을 막고, 궁극적으로 평화에 도달하기를 원한다. 이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살인하지 말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계명에 상응한다.

사실 평화주의 전통의 원조는 기독교이다. 로마 제국 하의 초대 기독교에서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순교를 당하거나 탄압을 당한 것은 그들이 황제의 군대에 복무하기를 기피하거나 전쟁에 종사하는 것을 거부했던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인류 전체의 공멸을 초래할 수 있는 핵무기 시대에 처음부터 병역을 거부함으로써 평화의 길을 모색하려는 몸부림은 우리에게 평화만이 생존을 위한 유일한 조건임을 깨우쳐준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증인을 이유로 양심적 병역 거부를 반대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전통 가운데 하나인 평화주의의 전통을 함께 팽개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잘못된 양심’에 의한 병역 기피

반대-조영엽교수 / 계약신학대학원대학교

서울남부지방법원 이정열판사는 지난 5월21일 여호와의 증인 신도 3명이 제소한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대한민국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병역 기피이다.

첫째,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 자체가 잘못된 양심이다. 양심이란 선과 악, 공의와 불의,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을 판단하고 항거하도록 명령하는 도덕적 자아 주체이다. 성경은 사람의 타락한 양심을 ‘화인맞은 양심’(딤전 4:2), ‘악한 마음’(마 9:14)이라고 정의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라고 믿는 신자에게 있어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양심의 정의인 것이다. 따라서 양심적 병역 거부란 잘못된 양심에 의한 병역 거부요 병역 기피다.

둘째,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병역의 의무는 절대 필수다. 이런 상황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나, 양심의 자유가 국토방위의 신성한 임무인 병역의 의무를 거부할 수 있다는 논거는 용납할 수 없는 역설이요 궤변이다. 병역의 의무를 지지하는 절대 다수의 국민들의 양심은 비양심적인가?

셋째, 남한과 북한은 같은 동족이나 국가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이념적으로는 반공(anticommunism)이다. 반면에 북한은 국민(인민)의 인권을 탄압하는 독재체제 공산주의 국가다.

넷째, ‘대체 복무제’란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비전투 분야에서 봉사활동으로 군복무를 대체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전투에서 멀리 도피해 자신들만이 살겠다는 집단적 이기주의자들이며, 반 애국자들이며, 자신들의 임무를 거부하는 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대체 복무는 형평성 원리에도 위배되므로 반대해야 한다. 국가의 공공 유익을 위해 군복무를 면제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대체 복무제를 시행하는 독일, 대만을 위시한 다른 나라들은 국가 안보 상황이 우리와 다르다.

다섯째, 양심적 병역 거부란 병역 기피다. 병역 기피는 국가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며, 국민 불안감 조성, 국론 분열, 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매우 중대한 문제다.

여섯째, 양심적 병역 거부 찬동론자들은 진보 좌경 사상을 지닌 반민주적 사람들이다. 다수의 의견을 무시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나 그들을 옹호하는 민주 인사들이란 결단코 민주 인사들이 아니라 반 민주적 인사들이다.

군인의 임무는 국토방위와 국가 안보에 있다. 국토방위, 국가안보는 국력과 국군의 정신무장, 신체단련, 무기의 현대화에 달려 있다. 힘의 우월만이 외부의 침략을 물리치고 안보를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다.

국가 위정자들은 건국 이념과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국민들이 안정된 삶을 영위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위정자들이나 집권 여당이 악법을 입법화하고, 백성들에게 강요할 경우 국민,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입장과 태도를 취하여야 할 것인가? 정부의 권력은 절대적이 아니다. 하나님은 왕들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정부의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계명에 위배되는 악법을 강요할 경우 시민은 정부의 권력을 박탈해야 하며, 시민들은 시민 불복종으로 항거해야 한다. 시민은 정부의 불의에 저항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에 대한 복종은 무조건적이 아니다. 사무엘 루터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는 그의 저서 ‘What is the Concept in Lex Rex?’에서 “법은 왕이다. 만일 왕과 정부가 법을 순종하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불복종 당해야 한다. 그리고 법은 하나님의 법에 근거하고 있다”고 했다.

정당방위를 위한 폭력은 선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이나 정당화 될 수 없다. 폭력은 정당한 수단이 될 수 없으며 또 다른 폭력을 산출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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