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사활거는 보석 같은 후배 발굴하는 일, 제2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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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사활거는 보석 같은 후배 발굴하는 일, 제2의 사명”
  • 정리=이인창 부장
  • 승인 2020.01.21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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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세 조기은퇴 후 새 목회인생 시작한 정성진 목사 /사단법인 크로스로드 대표

23년 전 거룩한빛광성교회 개척 후 지난 11월 조기은퇴
“민중과 함께하는 것이 꿈”…전도사 시절 광산촌서 목회
“교회 성장은 좋은 것, 그러나 나누지 않으면 탐욕일 뿐”
“후배 목회자들 도우며, 남들 하지 않는 사역을 펼칠 것”

개척 목회자가 평생을 사역한 교회와 성도들을 떠나 은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교회 곳곳에 배어있는 기도와 추억을 온전히 내려놓는 것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서운함이다. 거룩한빛광성교회를 개척하고 지난 11월 평소 약속했던 대로 65세 조기은퇴를 결행한 정성진 목사. 그 역시 은퇴가 서운함 그 이상이었다고 고백했다. 지금도 어색하고 불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아사교회생’(我死敎會生). 내가 죽고 교회가 살아야 한다는 목회철학을 여전히 지켜가야 한다는 것을. 2만 명에 가까운 교세로 성장시켰고, 원로목사 제도를 폐지하겠다는 약속도 지켰다.  은퇴 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정성진 목사를 만났다. 

일시 : 2020년 1월 9일

장소 :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관 크로스로드 사무실
대담 : 이현주 편집국장

거룩한빛광성교회를 세우고 약 2만명에 가까운 교회로 부흥시킨 정성진 목사. 그는 65세 조기은퇴를 실천한 후 제2의 사역을 시작하고 있다.
거룩한빛광성교회를 세우고 약 2만명에 가까운 교회로 부흥시킨 정성진 목사. 그는 65세 조기은퇴를 실천한 후 제2의 사역을 시작하고 있다.

목회 일선에서 은퇴하신 지 곧 두 달이 다 되어 갑니다. 은퇴식 이후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 계셨습니까.

거룩한빛광성교회를 개척하고 23년 동안 교회 안에서 주로 살았습니다. 개척하고 8년 반 동안은 새벽 4시 20분에 가장 먼저 교회 문을 열고 가장 나중에 닫았습니다. 교회가 집이었습니다. 그간 교회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저를 도왔고 교회를 중심으로 살았죠. 전화 한통이면 교회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직접 그 일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은퇴자의 어려움이 이런 거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즘 힘든 이유를 생각해보니 리듬이 깨지고 동선이 바뀌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크로스로드 사무실이 있는 종로까지 오려면 최소 1시간 반은 잡아야 합니다. 또 예배를 드리는 DMZ 해마루광성교회까지 북쪽으로 1시간입니다. 이 스트레스를 어떻게해결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큰 교회에서 목회를 같이하는 사모님께서도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목회를 하면서 사모님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아내가 많은 역할을 했고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직접 성경공부 교재도 만들어가며 교인들 1만2천명에게 전도 교육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신학교 동기인데 공부를 아주 잘 했습니다. 여러 말을 하지 않고, 측근을 두지 않고 게토를 만들지도 않았죠. 사모의 역할을 잘 감당해 주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한번도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었던 것에 참 감사하고 있습니다. 조기 은퇴를 결심하고 퇴직금 1억원을 고스란히 헌금하기로 한 결정이 저의 일방적인 행동이었는데 아내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처음 광성교회 부목사를 부임할 때 공무원이었던 아내는 4년만 더 일하면 연금을 받을 수 있는데도 저의 뜻을 따라 계산 없이 그만두고 함께 동역했습니다. 알콩달콩 한 것은 없었지만 호흡을 맞추면서 오로지 목회라는 길을 함께 걸어왔습니다. 그래도 가끔 정색을 하면서 이야기할 때는 무섭습니다(웃음). 기도하면서 이야기 해주는 것이니, 사모의 말에 귀기울이고 다른 길로 가지 않고 욕심도 버릴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목회자가 되셨습니까? 아주 어릴 적부터 비전이셨나요?

저희 어머니는 교회 세 곳을 개척할 정도로 헌신적인 분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전형적인 장로교회에서 자라났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군복무를 하며 육군대학 교회에서 군종까지 했지만 그 때도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회사를 다니다 정치에 욕심이 있어서 신민당에 입당하려고 했습니다. 방송통신대를 다니면서 공부할 때인데, 막 입당원서를 제출하려 가는 길에 YH 사건(1979년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 점거농성 중 경찰 강제진압으로 김경숙 조합원 사망)이 발생해 그 여파로 입당 자체가 막혀 크게 좌절했습니다. 그 즈음 친한 친구가 자살을 한 것도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충격으로 심장에 병이 생겼죠. 그 때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권했던 신학을, 죽기 전에 해보자고 마음먹고 당시에는 무인가 신학교였던 서울장신대 문을 두드렸습니다. 다행히 1981년 신학교에 입학하던 그해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면목동 순복음교회에 참석했다가 하나님을 영접하게 됐고 그 이후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께서 활동했던 이력들을 보면, 여느 목회자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젊은 시절 소위 진보적인 활동들을 많이 하셨는데요. 이런 이력이 인상적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가 민중신학을 접하게 됐고, 영등포산업선교회에 참여하면서 목민선교회 고영근 목사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신학교 동기들은 목연과정을 거쳐 목사안수를 받을 때, 저는 경기도 음성의 광산촌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목사가 되는 것보다 민중과 사는 것이 꿈이었던 시절입니다. 원래는 섬에서 목회하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미혼이라고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광산촌 담임으로 가기 위해 우리 반에서 제일 똑똑한 아내를 따라다닌 끝에 결혼했습니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여성을 만난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광산촌에 들어가 교회에서 시무할 때 재개발로 인해 환경이 위협받고 주민들이 피해를 입을 위기였습니다. 공동위원장 자격으로 주민들과 함께 개발업자들과 맞서 싸웠고 결국 이겼습니다. 부임했을 때 30년 된 교회에는 할머니 교인만 6명이었는데, 떠날 때는 140명까지 전도해 부흥도 시켰습니다. 당시 주말부부로 지내던 아내가 유산을 하면서 눈물로 작별을 하고 교인들과 헤어졌지만, 목회를 하면서 지금까지 광산촌 교회를 위해 지원해왔습니다. 돌아와서 목사가 될지 말지 고민도 했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려면 정식코스로 해야겠다고 생각해 당시 방통대 학사과정을 마치고 신대원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시국이 1987년이었습니다. 당시 전국 신학대학원 학교대표자협의회 초대회장을 맡게 됐고, 신대원생 400명과 함께 6.10 항쟁에 참여했습니다. 참 열정적인 시절이었죠.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절이다 하더라도 목사님의 활동 이력을 교회에서는 부담스럽게 여겼을 것 같습니다. 신대원을 마치고 사역지는 어디였습니까?

원서만 내면 나를 청빙할 곳이 많을 거라고 자신했는데 빨갱이 취급을 하면서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겨우 봉천제일교회 교육전도사로 일 년 동안 사역하다, 김창인 목사님이 시무하던 광성교회 부목사로 옮겨갔습니다. 그곳에서 순종 훈련을 받았던 것 같아요. 김창인 목사님 비서로 일하면서 350세대 교구를 담당했죠. 목사님이 부총회장, 총회장, 증경총회장으로 가장 바쁜 사역을 할 때였는데, 대전과 강원까지 심방하면서 하루 평균 100킬로미터 이상을 이동하면서 4년 동안 목양했습니다. 광성교회 재직이 5천명일 때 재직일람 책자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매년 연초면 주일예배가 끝나자마자 사무원과 인쇄소서 들어가서 8일 동안 밤샜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일중독일 정도로 열심히 했던 시절입니다. 

1990년대 후반 일산 신도시기 조성되고 나서 그곳에 개척을 하셨습니다. 개척시절과 교회 성장 과정을 들려주십시오. 
 
 
김창인 목사님은 통이 크고 의리가 있으셨습니다. 5년 동안 사역을 한 후 광성교회에서 개척을 위해 10억원을 지원해주셨습니다. 수석목사도 아닌데 그 만큼 큰 재정을 지원해준 경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때 10억이면 지금 물가로 환산해도 엄청난 금액이었죠. 당시 대출 7억원을 받아 고양시에서 17억원 예배당을 매입했습니다. 광성교회 성도 중 일산에 살던 열 가정이 등록하면서 시작했는데, 거룩한빛광성교회가 일산 신도시에서 280번째 개척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해 연말 IMF 외환위기가 닥쳤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대출도 있었기 때문에 무너질 수 있었는데,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첫 해 장년 400명, 정확하게 아이들까지 1천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어져 6만명이 등록한 교회가 됐습니다. 전도 행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한 해 4천명이 등록한 해도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제직은 7천명 정도 됩니다. 교인들은 자신들이 지원한 부서에서 사역하고, 360개 팀은 대표를 자체적으로 선출하고 있습니다. 매년 교적을 정리하고 있으며, 출석교인이 1만9천명에 이를 때 4,500명을 거룩한빛운정교회로 분립시켰습니다. 이처럼 성장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교회 성장은 중요합니다. 다만 성장을 했을 때 그것을 나누지 않으면 그것은 탐욕입니다."

목사님은 대형교회 목회자이면서, 대형교회 부작용에 대해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저는 대형교회를 꿈꾸지 않았고, 큰 교회를 하겠다고 말 해본 적도 없습니다. 숫자를 목표로 정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고, 창조적 소수가 그루터기라는 생각을 어렸을 때부터 가졌습니다. 어느 날, 8,300평 부지에 본당 3,500석 건축을 하기로 했는데, 문득 ‘이것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는 300명이면 대형교회라고 여기도록 인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1~2만명 되는 교회는 산업화 시대 산물이고 기형이다’ ‘경영능력이 있는 목사들이 들어오면서 자본주의 논리가 반영되었다’고 세미나에서 종종 이야기합니다. 저 역시 내 안에 경영마인드가 있으니까 미리 땅을 사고 건물을 샀습니다. 대형교회는 성경적 교회상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바꾸어야 합니다. 물론 대형교회가 큰일을 할 수 있는 순기능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공룡 구조이기 때문에 작은 교회를 잡아먹고, 의도와 상관없이 수평이동이 이뤄지고 교인들의 헌신도가 떨어지게 됩니다. 예수 정신을 구현하는 데는 좋지 않습니다. 기독교 정신을 위해서는 대형교회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작게 분립해야 합니다. 

은퇴시기에 즈음해 ‘성장하는 교회들을 위한 8가지 정석’이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무엇을 위한 책입니까?

2000년 크리스천 A 슈바르츠 목사가 쓴 ‘자연적 교회 성장’을 읽고 ‘바로 이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1990년대 전 세계 32개 국가에서 성장하는 1,000 교회를 분석한, 지금 표현으로는 빅 데이터를 발표한 것입니다. 당시 은사중심 평신도 사역에 관심을 두고, 평신도가 다이나믹해야 교회가 부흥한다는 생각을 할 때였는데 그 생각과 딱 맞는 책이었습니다. 책 내용을 적용해 바로 설교도 했습니다. 마지막 2018년 중요한 내용을 모아 다시 설교했는데, 지금까지 3번 반복했습니다. 아직도 많이들 몰라서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책 내용을 알려주고 싶어 세미나를 개최합니다. 한 번 할 때마다 400만원 이상을 지출해야 하지만 바른 목회의 좋은 툴이기 때문에 계속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 세운 툴이지만 내가 만든 것보다 낫습니다.

목사님은 비대해지는 교회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에게 성장을 가르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성장배타주의’는 상당히 위험하다고 봅니다. 성장은 중요합니다. 다만 성장을 했을 때 나누지 않으면 그것은 탐욕입니다. 목회자 교육을 하는 우리 ‘크로스로드’의 세미나실 이름은 ‘광야의 영성’입니다. 교회가 성장을 하기 위해는 목회 야성(野性)을 길러내야 합니다. 다윗의 물맷돌처럼 자기만의 무기를 가져야 합니다. 젊은 목회자들이 야성이 없고 갈 바를 모르는데도 무엇이 문제인지 원인을 찾지 못합니다. 가야 할 곳은 숱하게 많습니다. 큰 교회만 가고 싶어 하는데 그건 착각입니다. 큰 교회가 자체가 지옥일 수도 있습니다. 야성을 가진 사람들이 성공해야, 큰 교회에서 모시고 갑니다. 지금은 목회에 사활을 거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목회에 사활을 거는 보석 같은 사람들을 찾아서 강사로 세우고자 합니다. 이런 강사와 목회자들을 만나게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 통전적 문제 상황을 많이 경험해봐서 알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뛰어내릴 상황에서는 뛰어내리는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조기은퇴를 후회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후회는 전혀 없습니다. 신학교 시절 회지 ‘삶의 자리’에서 말했던 약속을 지킨 것이니 됐습니다. 좋은 신념은 바뀌면 안되죠. 일시적 기분으로 조기은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은퇴 심정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내가 은퇴를 했는데 이제 어디로 가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원로목사 제도를 없앴으니까 섬기던 교회를 가지는 않습니다. 연말에 본 교회에서 송구영신예배 설교를 초청했지만, 제주도 작은 교회에서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목사님의 제2의 목회인생이 시작됐습니다. 목사님께서 관심있는 다른 사역이 있으시다면 마지막으로 설명 부탁드립니다. 

파주 민통선 안에서 매물로 나온 18평 작은 집을 샀습니다. 그곳에서 통일을 위한 기도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기도가 없이는 통일이 안 됩니다. 보육원 출신 아이들을 돌보는 사역도 계속할 것입니다. 성인이 돼 사회에 나온 아이들의 40% 이상이 연락이 안됩니다. 우리가 돌보는 고아 출신 어느 아이는 70%라고 까지 이야기해요. 사회에 들어가면 차별도 심하고 생활관리가 안되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의 ‘비빌 언덕’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은퇴를 했으니 남들이 하지 않는 사역을 하려고 생각합니다. 제2의 사역을 위해 기도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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