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 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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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 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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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9.09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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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예술과 하나님의 마음 (13)
▲ 안용준 목사

현대예술의 최전선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쾌락에 취해 인간의 영혼을 황폐케 하는 일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예술 활동이 지나치게 감성 위주로 흐르면서 유혹과 타락의 경계선을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때로는 허무주의적이며 무정부적인 특성을 나타내며 사회적이며 종교적인 논증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그 주역들은 대중의 심리를 꿰뚫고 세계 예술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극하고 있다. 

이런 부류의 예술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발견된다. 중요하게 밝혀두어야 할 것은 이것들이 미디어와 시장의 폭발적 반응을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대중이 쉽게 열광하고 수용하도록 화려하고 자극적인 비주얼의 퍼포먼스를 감행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진지한 예술의 전통을 경멸하듯 이들의 기세는 극단적이고 혼란스러우며 뻔뻔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은 하나님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풍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한다. 

어떻게 해야 이 깊은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보아야 하는지 쉽게 떠오르는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활동하고자 하는 크리스천 예술가에게는 많은 고민이 따르기 마련이다. 특히 우리 시대의 예술적 현실을 바로 알기 원하는 예술가일수록 그 고민의 종류가 다양하고 크다고 할 수 있다. 이해하기 어렵고 도전적인 예술이 이루어지는 현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정당하면서도 품위 있는 예술적 소명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하지만 우리는 새벽에 동틀 무렵이 가장 어둡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극심한 절망과 고통은 전혀 다른 차원의 소망을 잉태하는 법이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랬다. 그는 자신의 몸 하나 제대로 추수 릴 수 없는 낙심의 한복판에서 있었다. 그는 고향인 아나돗 사람들에 의해생명의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종일토록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불타는 성읍을 눈물로 바라보아야 했다. 그 거리 한 가운데서 배고픔으로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피눈물로 바라만 보아야 했다.

이러한 예레미야가 미래를 바라보며 소망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비전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완전히 엎드려 입술을 티끌에 대었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사방에서 성령이 바람이 불어왔다.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소망의 바람이었다. 그렇다! 우리의 능력과 모습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인해 소망이 있는 것이다.   

더욱이 어느 시대나 어떤 사람들에게나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해결책을 얻기를 바란다면 주님 앞에 납작 엎드려야 한다. 위 모든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주의 인자와 소망을 바라보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내밀한 음성은 인간이나 예술의 성격을 밝히는 학문이나 심리학적 분석을 넘어서는 신비한 힘이 담겨있다. 예술의 모든 형식을 뛰어넘어 고상하며 차원 높은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 있다. 그리하여 성경의 관점에서 바람직한 예술문화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무엇인지 찾아낸다면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예술 이론에 도달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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