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여인을 통해 ‘생명의 싹’을 틔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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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여인을 통해 ‘생명의 싹’을 틔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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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8.2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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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예술과 하나님의 마음 (11)
▲ 안용준 목사

박수근의 그림에는 바위의 질감위에 우리나라 산천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앙상한 나무들이 자주 등장한다. 단순한 구도 속에서도 고향의 정서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무엇보다 이 정경들은 한국전쟁의 깊은 상처가 몰고 온 전후의 피폐한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는듯하다. 여러 종류의 수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장면을 그리기에는 사회적 분위기가 녹녹치 않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썰렁한 겨울풍경이요, 전쟁 이후의 궁핍한 시대상의 투영일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엔 인간의 이성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생명’ 자리하고 있다. 창조세계의 요소요소에 작용하는 생명은 껍데기처럼 보이는 나목에도 여지없이 그 숨결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생기는 잔잔히 화면 전체에 스며들고 있다. 그려지진 않았지만 이 생명의 은총은 삶의 풍성함이다. 미래에 대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소망이다. ‘생명’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생물학적인 단절을 의미하는 ‘죽음’까지도 이길만한 넉넉한 그릇이다. 

그래서 박수근의 회화는 샬롬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적(Spritual) 예술이라 불릴 만하다. 성령의 내주하심을 체험한 박수근은 그 열매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친절함, 선함, 실실함, 온유, 그리고 절제는 삶과 예술세계의 방향이요 이정표였다. 진정 인간의 제한된 이성의 힘으로 ‘생명’의 신비로움을 완전히 깨달아 알 수 없다. 박수근의 영성은 성령의 내주와 인도하심으로부터 내적 변화를 거듭하는 가운데 심화되고, 성화를 위한 의지의 결단과 실천을 통해 더욱 다져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 캔버스에 유채, 130×89cm, 1962.

한편 전후 한국의 소시민들은 척박한 현실을 이겨내려는 인고의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60년대까지도 포장이 안 된 질퍽질퍽한 도로가 서울의 곳곳에 보였으니, 다른 곳은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경제 사정이 낙후되어 있었다. 지구 저편의 이스라엘의 사막 한가운데는 종려나무가 무성하고 수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으니 부러워할 만도 했다. 당시 한국의 여인들은 메마른 현실에서 풍성한 수풀을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목의 주위에는 생활을 위해 어디론가 이동하는 시골부인이 보인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려는 단단한 의지가 엿보인다. 

우선 “여자는 계획되지 않은 우연한 일을 남성지도자들과 달리 방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해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은 여성들이 가진 남성보다 뛰어난 강점이라고 한다. 전통적으로도 여성은 서로 경쟁적인 형제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 삼촌 고모와 같은 친척들 사이에서 서로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해왔고, 한 가족과 사회를 잇는 역할을 해왔다. 이것을 기독교세계관의 시각에서 풀이하자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과 같이 남편과 가족에게 순종하는 삶의 태도라 할만하다. 희망의 싹을 틔우기 위해 위기의 시간을 인내와 사랑으로 포근하게 아우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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